댓글로 자세히 다뤄주었으면 좋겠는 예술가나 예술적 사건을 추천해 주시면 아트아트가 소개해 드려요!
출처 : gettyimages
오늘은 피카소의 예술 세계를 당시 영향을 주고받았던 예술가들 위주로 살펴볼까 해요. 피카소의 스승, 친구부터 라이벌까지 모두 만나 보아요! 👪
먼저 보고 들어가는 키워드 🚶
1. 모방 🎨
피카소는 13살에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의 그림 실력을 뛰어넘었어요.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느낀 그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베껴 그리며 실력을 키웠습니다. 전 세계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몽마르트르에 가서도 자신보다 잘 그리는 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가요.
2. 입체주의 🔧
모방의 대가라고 알려진 만큼, 피카소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받았어요. 피카소 하면 빠질 수 없는 혁신적인 미술 사조인 입체주의 또한, 그의 세잔과 마티스에게 영향을 받고, 바르크와 함께 발전시켜 나간 것입니다.
3. '피카소가~' 💬
'한국의 피카소', '제2의 피카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피카소라는 이름은 천재 화가의 대명사입니다. '피카소가 00 한'이라는 수식어도 자주 쓰이는데요. 그중 피카소가 질투하고 극찬했던 두 인물에 대해 알아봅시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거고, 네가 신부님이 된다면 교황이 될 수 있을 거란다.'
나는 화가가 되었고 피카소가 되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
피카소가 9살 때 그린 그림, 투우와 비둘기 1890
출처 : pablo
피카소를 왜 천재라고 부를까요?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옹알이하기 전부터 그림을 먼저 배웠어요. 그리고 처음 내뱉은 단어가 '연필'이었다죠.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는 피카소의 천재성을 감지하고, 어린 피카소에게 새의 다리를 그려 넣으라고 시켰어요. 이후 피카소가 가져온 그림을 본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내 꿈을 이루어다오.” 🐦
1897, 과학과 자선
출처 : wikiart
피카소는 13살 때 아버지의 그림 실력을 뛰어넘었어요. 위 그림은 피카소가 15살 때 그린 작품인데요. 벌써 구도와 색채, 기법 등을 완벽하게 구사해 냈죠? 최연소로 입학한 바르셀로나의 예술 학교에서는 한 달이 걸리는 과제를 하루 만에 완성하는 건 물론, 1등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해요.
이후 스페인의 최고의 명문 미술 학교에 문을 두드리지만, 이곳에서도 배울 것이 없다고 느낍니다. 이때부터 피카소는 수업에 가지 않고, 옛 거장의 그림을 열심히 베껴 그리며 실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어요. 🌆🌇
19살이 되던 해,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로 떠납니다. 전 세계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몽마르트르로 말이죠. 🇫🇷
과연 피카소는 그곳에서도 남들보다 우월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파리와 어른의 세계는 달랐어요. 그는 패배감을 느꼈지만, 그러한 자극이 현대의 피카소를 만들어 주었죠. 피카소는 자신보다 잘 그리는 화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립해 나갑니다.
먼저 1901년부터 1904년까지를 피카소의 청색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이유는 이 시기 그림이 대체로 차가운 느낌을 주는 청색 빛을 띠기 때문입니다. 내용 또한 비참함과 절망, 궁핍함을 주제로 매춘부, 거지, 방랑자 등의 모습을 자주 다루었어요. 🌀
흔히 청색 시대는 당시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하는 궁핍한 삶과 친구 카사게마스를 잃은 경험이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데요. 이와 더불어, 당시 소외당하던 이들의 모습을 그렸던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도 있어요.
(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숙취, 1888 (왼) 피카소,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901
학창 시절,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전통 방식에 불만이 있었던 피카소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특유의 일렁이는 그림을 그리는 엘 그레코를 좋아했어요. 왼쪽 작품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모방한 피카소의 '카사예마스의 매장'입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입체주의 시기의 피카소의 걸작, '아비뇽 처녀들'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쳐요. 🌊
(왼) 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 (오) 피카소, 인생, 1903
출처 : vangoghmuseum, pablopicasso
피카소는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을 사서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고 하는데요. 위 작품은 청색 시대의 걸작인 '인생'입니다. 작품 가운데 쭈그려 울고 있는 여성 보이죠? 이는 반 고흐의 '슬픔'을 오마쥬한 것이에요. 💧
피카소의 첫 번째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출처 : serkanhizli
이후 피카소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동갑내기 페르낭드 올리비에입니다. 이후 청색 시대는 막을 내리고, 1904년부터 1906년까지 따뜻한 색감의 물감을 쓴 '장밋빛 시대'가 열려요. 이 시기 피카소는 서커스 구경을 다니며 광대나 여성 곡마사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그래서 광대, 곡예사, 배우, 점성술사, 마술사 등도 그림 속에 등장시키죠. 🌹🎪
피카소, 곡예사 가족, 1905
출처 : wikiart
장미빛 시기에도 피카소는 다른 화가들의 화풍을 스폰지처럼 흡수했습니다. 특히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제목마저 똑같이 붙여 많이 모방하였어요.
(왼) 디에고 벨라스케스, 부채를 든 여인, 1638~1639 (오) 피카소, 부채를 든 여자, 1905
출처 : wikimedia commons, arthive
그런데 피카소가 모방한 작품 모두, 원작과는 확연히 다르죠?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 그는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본받아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하였습니다. 📝
입체주의를 만든 이후로도 자주,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따라 그렸는데요. 그대로 갖다 베낀 것이 아닌, 훔쳐 놓듯이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그림을 탄생시켰죠.
피카소의 비서였던 하이메 사바르테스는 “피카소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누구도 흉내 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왼)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오)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출처 : kiamaartgallery, thekoreaherald
피카소의 작품 중 한국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이는 1951년,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한국에서 벌어진 미군의 잔혹한 행위를 알리는 그림을 의뢰받아 그린 작품입니다. 이 또한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3일' 작품을 패러디한 것이에요. 🇰🇷
(왼) 들라크루아, 알제의 여인,1834 (오) 피카소, 알제의 여인, 1955
출처 : 경향신문
오른쪽 작품은 피카소가 74살 때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를 재해석한 연작 중 하나인데요. 이 그림을 모방한 특별한 계기가 있다고 해요. 바로 원작 그림의 오른쪽, 물담배를 피우는 여인이 피카소의 마지막 반려자인 자클린 로크를 닮았기 때문이었죠.
출처 : 국방일보
(왼)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오) 피카소, 시녀들, 1957
출처 : esearchgate, pablopicasso
피카소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6살 때였습니다. 당시 매일 같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따라 그렸죠. 1957년, 피카소는 76세의 늙은 나이에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따라 그려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무려 회화 58점이나 그렸습니다. 📜
'시녀들'의 전체 그림을 그리거나, 일부를 떼어 독립적인 작품을 그렸어요. 보시다시피, 이미 자신의 화풍을 완성한 피카소는 원작을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변형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현대미술 사조를 창시했는데, 왜 다른 화가의 작품을 모방하느냐고 물었어요. 이에 피카소는 “천재성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
Key point
천재 미술가 피카소는 학교에서는 배울 것이 없어, 옛 미술 거장들의 그림을 베껴 그리며 실력을 키웠어요.
전 세계 천재 미술가들이 모여 산다는 파리 몽마르트르에 가서도 자신보다 잘 그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청색, 장밋빛 시기는 물론, 입체주의를 만든 이후로도 그는 원작을 자기 스타일로 변형해 다수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입체주의는 피카소 혼자 만든 게 아니다? 😲
아프리카 조형물로 채워진 몽마르트르의 작업실에 앉아있는 피카소.
출처 : wikimedia commons
장미 빛 시기 이후, 1907년부터 피카소는 아프리카 원시 미술에 크게 매료돼요. 또한 이때부터 입체파 운동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하죠. 그리하여 피카소는 여러 방향에서 본 사물의 모습을 한 화폭에 담아내는가 동시에, 그림에 아프리카 미술적 요소를 추가해 이전에 보여 준 적 없는 미술을 선보입니다. 🍖
* 원시 미술: 서구미술에 비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원시적인 느낌과 강렬한 보색 대비가 특징이다.
* 입체파 운동: 대상을 분석하고 분해하여 추상화된 형태로 재조립하는 형태
그 실험적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은 아프리카 가면을 쓰고 있어요. 이 작품에 바로 엘 그레코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
(왼)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오) 엘 그레코,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1608~1614
출처 : 신동아, wikipedia
여기서 가장 파격적인 시도는 바로 원근법의 파괴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500여 년 동안 내려온 서구 미술의 전통인 원근법을 철저히 무시했어요. 평평하고 각진 다섯 여인에게 깊이와 공간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이러한 기법은 피카소가 “나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불렀던,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
폴 세잔, 사과 바구니 1895
출처 :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세잔은 본질을 탐구하여 대상을 단순하고 도형적으로 표현하고, 혁신적인 색채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어요. 위 그림을 통해 확인해 볼까요? 사과 하나하나가 조금씩 뒤틀려 보이는데요. 흔히 정물화는 사물을 한 방향에서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거잖아요? 그런데 폴 세잔은 다시점에서 본 대상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냅니다. 이것이 형태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보았죠. 🍎
이러한 세잔의 표현 방식에 영감을 받은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얼굴의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표현하는가 하면, 심지어 오른쪽 아래 여성의 몸은 뒷모습으로 그렸습니다. 😦
흔히 입체주의는 피카소, 그의 작품 중에서도 '아비뇽의 여인들'에서 시작했다고 봐요. 그런데 그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바로 폴 세잔이죠.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출처 : wikipedia
피카소 말고 폴 세잔에게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피카소의 라이벌이었던 앙리 마티스입니다. 이 내용은 15번째 아트레터, '현대 미술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편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요. 폴 세잔을 통해 피카소가 형태의 해방을 얻었다면, 마티스는 색채의 해방을 얻었어요. 💐
마티스는 사물 고유의 색을 존중하던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주로 즐거움과 행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야수주의의 거장입니다. 💃
두 거장이 평생의 라이벌 관계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요. 피카소가 가장 공들여 그린 것으로 알려진 '거트루드 초상'은, 어느 날 스타인 집 벽난로 위에 마티스의'모자를 쓴 여인'이 걸려있는 것을 본 피카소가 마티스보다 더 잘 그리겠다는 욕구에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당대 힘없고 가난했던 청년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부잣집 작가이자 미술 평론가예요. 💰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6
출처 : wikiart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치열하게 의식했는데요. 12살 어린 피카소가 더욱 경쟁심이 강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가 원시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마티스가 원시미술에 심취해 있다는 것을 알고 연구 과제를 빼앗으려는 의도였죠. 심지어 피카소가 세잔의 형태를 가져온 것도, 마티스가 세잔의 예술에 관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 보인 행동이었어요. 🙎 ...👀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들, 1908
출처 : wikipedia
입체주의라는 명칭은 마티스의 말에서 유래되었어요. 이는 마티스가 피카소의 친구 조르주 브라크의 풍경화를 보고, '조그만 큐브(입방체)의 축적 같다'라고 한 말에서 왔습니다. 물론 이는 조롱의 의미였죠. 🔸
브라크는 마티스와 연관된 작가 그룹에 속해 있었고, 피카소를 만나기 전까지 야수파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였어요. 그런데 피카소를 만나고 그와 함께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 데 주력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세잔을 존경하는 동시에, 당시 둘을 후원하는 칸바일러로 동일한 모티브를 갖고 있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마치 결혼한 것처럼 가깝게 지내며 자주 같이 작업하며,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 단계로 입체주의를 전개해 나가요. 🚴
(왼) 조르주 브라크, 포르투갈인, 1911 (오) 피카소,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 초상, 1910
출처 : wikiart
분석적 입체주의란 대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기하학적 모양으로 분해하고, 그 외의 것들을 배제하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인데요. 이 시기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그림은 대체로 비슷해요.
이후 조금 더 대상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종합적 입체주의가 등장합니다. 신문, 벽지, 모래, 철사와 같은 실제 물체의 요소들을 붙여, 새로운 조형 효과를 나타내는 방식이에요. 이는 현대적 콜라주로 발전하면서, 미술 재료가 아니었던 것들에 대한 예술적 가치의 인식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죠. 📰
이처럼, 입체주의는 마티스와의 경쟁심으로 발단하여, 세잔이 마련한 기틀과 동료 바르크와 함께 전개해 나간 것입니다. 👪
Key point
입체주의의 발단은 마티스와의 경쟁심에서 시작됐습니다.
마티스의 연구 대상이었던 원시 미술, 세잔의 형태의 영향으로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이 탄생했어요.
다시점에서 본 대상 모습을 한 화폭에 담아낸 세잔이 입체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나간 것은 피카소와 바르크입니다.
분석적 입체주의는 대상을 기하학적인 단위로 해체하여 재구성하여, 어떤 대상인지를 파악하기 힘든 것이 특징이에요.
종합적 입체주의는 현실의 다양한 오브제를 붙이는 기법으로, 실제 사물의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역행하는 그림 실력? 👴➡👶
피카소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나열해 보면, 그림 실력이 역행하는 듯 보이죠? 피카소는 평생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어요. 그는 라파엘처럼 그리는 건 4년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건 평생이 걸렸다고 말했죠.
출처 : MOMA
그래서 피카소는 당시 아마추어라 조롱받는 앙리 루소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앙리 루소는 회사에 다니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다, 49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화가입니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소박파'라, 매우 서툰 그림 실력을 보여요. 사실과 다른 신체 비율은 물론, 공중 부양한 듯한 발과 일자 모양의 에펠탑을 그렸죠. 🗼
앙리 루소, 풍경 속의 자화상, 1890
출처 : wikimedia
하지만 원근법과 구도를 무시하고, 실제 같지 않은 대상의 표현은 피카소가 추구하는 미술이었습니다. 루소의 그림을 처음 본 피카소는 참신하다며 루소를 직접 만나러 갔다고 해요. 1908년에는 루소만을 위한 파티까지 열어줄 정도로 루소를 극찬했다고 하죠.
그러고 보니 루소 그림의 투박함과 어색함은 오히려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움을 줍니다. 루소는 피카소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예술가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
Key point
피카소는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싶어 했어요.
미술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아 못 그렸다고 비난받는 앙리 루소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피카소를 손절한 화가 💢
출처 : Getty Images
피카소가 사랑한 라울 뒤피, 피카소가 극찬한 프리다 칼로 등. 천재 예술가 피카소의 이름이 들어간 이 표현은, 많은 예술가의 수식어인데요. 그중 피카소가 질투한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알베르토 자코메티예요.
자코메티는 유명한 인상파 화가의 아들로, 매우 지적인 조각가였습니다. 그래서 피카소는 자코메티에게 조언과 의견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고 해요. 자코메티는 이전의 매끈하고 완벽한 비율의 조각상과 달리, 가늘고 긴 형태의 조각상을 만들었어요. 이 참신하고 새로운 시도를 피카소는 인정했죠. 😲
알베르토 자코메티, 걷는 남자, 1960
ⓒ Alberto Giacometti Estate / SACK, Seoul, 2017
그럼에도 피카소는 현대에 자코메티의 작품이 자기 작품의 경매가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한 듯, 그를 매우 시기했어요. 피카소는 그를 험담하고 다니는 것은 물론, 자신이 소속된 갤러리에 자코메티를 영입하려는 것을 극구 반대해 무산시켰죠. 심지어 자코메티가 사랑한 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빼앗으려고 하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어요. 😰
결국 피카소의 인간성에 실망한 자코메티는 피카소와 의절해요. 알고 지내는 동안 둘은 가치관에도 갈등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카소는 죽음에 가까워지자, 보고 싶은 사람으로 자코메티를 꼽았다고 해요. 😢
Key point
기존의 조각상 형태를 깨고 참신한 시도를 한 자코메티의 예술성을 피카소는 질투했어요.
미술 천재의 대명사 피카소는 자신보다 잘 그리는 화가들을 모방하고,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특히 그가 꽃피운 입체파는 스승, 라이벌, 친구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피카소를 통해 모방과 창조, 긍정적인 경쟁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출처 : lvhart.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파블로 피카소-
아팅이가 정리해주는 오늘의 내용 👮
천재 미술가 피카소는 학교에서는 배울 것이 없어, 옛 미술 거장들의 그림을 베껴 그리며 실력을 키웠어요.
전 세계 천재 미술가들이 모여 산다는 파리 몽마르트르에 가서도 자신보다 잘 그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청색, 장밋빛 시기는 물론, 입체주의를 만든 이후로도 그는 원작을 자기 스타일로 변형해 다수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입체주의의 발단은 마티스와의 경쟁심에서 시작됐습니다.
마티스의 연구 대상이었던 원시 미술, 세잔의 형태의 영향으로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이 탄생했어요.
다시점에서 본 대상 모습을 한 화폭에 담아낸 세잔이 입체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나간 것은 피카소와 바르크입니다.
분석적 입체주의는 대상을 기하학적인 단위로 해체하여 재구성하여, 어떤 대상인지를 파악하기 힘든 것이 특징이에요.
종합적 입체주의는 현실의 다양한 오브제를 붙이는 기법으로, 실제 사물의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피카소는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싶어 했어요.
미술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아 못 그렸다고 비난받는 앙리 루소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기존의 조각상 형태를 깨고 참신한 시도를 한 자코메티의 예술성을 피카소는 질투했어요.
✨아트아트의 스페셜 인터뷰! 회화작가 정하슬린✨
포브스코리아 '30세 미만 30인'에 선정된 작가 정하슬린! 그녀의 작업세계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작가는 물감을 통해 물질과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며, 캔버스에는 다양한 질감, 색감, 무늬가 층층이 쌓여있어 관객은 작가가 의도한 레이어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그 순서를 알아내는 매력적인 경험을 할 수있다. 정하슬린 작가는 삶에서 마주친 이미지들을 채집하고 내적 아카이브에 엮어서 전달하고자 한다. 그녀는 회화가 그러한 아이디어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아트아트 유튜브에서는 더욱 다양한 작가님들의 인터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구독하기
오늘 레터는 어떠셨나요?😎 댓글로 자세히 다뤄주었으면 좋겠는 예술가나 예술적 사건을 추천해 주세요!
썸네일 출처 : gettyimages
vol.31 훔치고 질투하고! 피카소의 예술 세계 👀
주제 추천해주신 <다운>님! 감사드립니다🥰
댓글로 자세히 다뤄주었으면 좋겠는 예술가나 예술적 사건을 추천해 주시면 아트아트가 소개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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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피카소의 예술 세계를 당시 영향을 주고받았던 예술가들 위주로 살펴볼까 해요. 피카소의 스승, 친구부터 라이벌까지 모두 만나 보아요! 👪
먼저 보고 들어가는 키워드 🚶
1. 모방 🎨
피카소는 13살에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의 그림 실력을 뛰어넘었어요.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느낀 그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베껴 그리며 실력을 키웠습니다. 전 세계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몽마르트르에 가서도 자신보다 잘 그리는 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가요.
2. 입체주의 🔧
모방의 대가라고 알려진 만큼, 피카소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받았어요. 피카소 하면 빠질 수 없는 혁신적인 미술 사조인 입체주의 또한, 그의 세잔과 마티스에게 영향을 받고, 바르크와 함께 발전시켜 나간 것입니다.
3. '피카소가~' 💬
'한국의 피카소', '제2의 피카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피카소라는 이름은 천재 화가의 대명사입니다. '피카소가 00 한'이라는 수식어도 자주 쓰이는데요. 그중 피카소가 질투하고 극찬했던 두 인물에 대해 알아봅시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거고, 네가 신부님이 된다면 교황이 될 수 있을 거란다.'
나는 화가가 되었고 피카소가 되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
피카소가 9살 때 그린 그림, 투우와 비둘기 1890
출처 : pablo
피카소를 왜 천재라고 부를까요?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옹알이하기 전부터 그림을 먼저 배웠어요. 그리고 처음 내뱉은 단어가 '연필'이었다죠.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는 피카소의 천재성을 감지하고, 어린 피카소에게 새의 다리를 그려 넣으라고 시켰어요. 이후 피카소가 가져온 그림을 본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내 꿈을 이루어다오.” 🐦
1897, 과학과 자선
출처 : wikiart
피카소는 13살 때 아버지의 그림 실력을 뛰어넘었어요. 위 그림은 피카소가 15살 때 그린 작품인데요. 벌써 구도와 색채, 기법 등을 완벽하게 구사해 냈죠? 최연소로 입학한 바르셀로나의 예술 학교에서는 한 달이 걸리는 과제를 하루 만에 완성하는 건 물론, 1등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해요.
이후 스페인의 최고의 명문 미술 학교에 문을 두드리지만, 이곳에서도 배울 것이 없다고 느낍니다. 이때부터 피카소는 수업에 가지 않고, 옛 거장의 그림을 열심히 베껴 그리며 실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어요. 🌆 🌇
19살이 되던 해,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로 떠납니다. 전 세계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몽마르트르로 말이죠. 🇫🇷
과연 피카소는 그곳에서도 남들보다 우월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파리와 어른의 세계는 달랐어요. 그는 패배감을 느꼈지만, 그러한 자극이 현대의 피카소를 만들어 주었죠. 피카소는 자신보다 잘 그리는 화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립해 나갑니다.
먼저 1901년부터 1904년까지를 피카소의 청색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이유는 이 시기 그림이 대체로 차가운 느낌을 주는 청색 빛을 띠기 때문입니다. 내용 또한 비참함과 절망, 궁핍함을 주제로 매춘부, 거지, 방랑자 등의 모습을 자주 다루었어요. 🌀
흔히 청색 시대는 당시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하는 궁핍한 삶과 친구 카사게마스를 잃은 경험이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데요. 이와 더불어, 당시 소외당하던 이들의 모습을 그렸던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도 있어요.
(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숙취, 1888 (왼) 피카소,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901
출처 : wikiart, arthive
천부적인 미술 실력과 함께 피카소는 모방을 통해 독창적으로 진화해 나갔습니다. 💡
(오)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1588 (왼) 피카소, 카사예마스의 매장, 1901
출처 : toledoinsight, arthive
학창 시절,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전통 방식에 불만이 있었던 피카소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특유의 일렁이는 그림을 그리는 엘 그레코를 좋아했어요. 왼쪽 작품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모방한 피카소의 '카사예마스의 매장'입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입체주의 시기의 피카소의 걸작, '아비뇽 처녀들'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쳐요. 🌊
(왼) 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 (오) 피카소, 인생, 1903
출처 : vangoghmuseum, pablopicasso
피카소는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을 사서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고 하는데요. 위 작품은 청색 시대의 걸작인 '인생'입니다. 작품 가운데 쭈그려 울고 있는 여성 보이죠? 이는 반 고흐의 '슬픔'을 오마쥬한 것이에요. 💧
피카소의 첫 번째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출처 : serkanhizli
이후 피카소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동갑내기 페르낭드 올리비에입니다. 이후 청색 시대는 막을 내리고, 1904년부터 1906년까지 따뜻한 색감의 물감을 쓴 '장밋빛 시대'가 열려요. 이 시기 피카소는 서커스 구경을 다니며 광대나 여성 곡마사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그래서 광대, 곡예사, 배우, 점성술사, 마술사 등도 그림 속에 등장시키죠. 🌹 🎪
피카소, 곡예사 가족, 1905
출처 : wikiart
장미빛 시기에도 피카소는 다른 화가들의 화풍을 스폰지처럼 흡수했습니다. 특히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제목마저 똑같이 붙여 많이 모방하였어요.
(왼) 디에고 벨라스케스, 부채를 든 여인, 1638~1639 (오) 피카소, 부채를 든 여자, 1905
출처 : wikimedia commons, arthive
그런데 피카소가 모방한 작품 모두, 원작과는 확연히 다르죠?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 그는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본받아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하였습니다. 📝
입체주의를 만든 이후로도 자주,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따라 그렸는데요. 그대로 갖다 베낀 것이 아닌, 훔쳐 놓듯이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그림을 탄생시켰죠.
피카소의 비서였던 하이메 사바르테스는 “피카소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누구도 흉내 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왼)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오)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출처 : kiamaartgallery, thekoreaherald
피카소의 작품 중 한국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이는 1951년,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한국에서 벌어진 미군의 잔혹한 행위를 알리는 그림을 의뢰받아 그린 작품입니다. 이 또한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3일' 작품을 패러디한 것이에요. 🇰🇷
(왼) 들라크루아, 알제의 여인,1834 (오) 피카소, 알제의 여인, 1955
출처 : 경향신문
오른쪽 작품은 피카소가 74살 때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를 재해석한 연작 중 하나인데요. 이 그림을 모방한 특별한 계기가 있다고 해요. 바로 원작 그림의 오른쪽, 물담배를 피우는 여인이 피카소의 마지막 반려자인 자클린 로크를 닮았기 때문이었죠.
출처 : 국방일보
(왼)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오) 피카소, 시녀들, 1957
출처 : esearchgate, pablopicasso
피카소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6살 때였습니다. 당시 매일 같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따라 그렸죠. 1957년, 피카소는 76세의 늙은 나이에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따라 그려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무려 회화 58점이나 그렸습니다. 📜
'시녀들'의 전체 그림을 그리거나, 일부를 떼어 독립적인 작품을 그렸어요. 보시다시피, 이미 자신의 화풍을 완성한 피카소는 원작을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변형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현대미술 사조를 창시했는데, 왜 다른 화가의 작품을 모방하느냐고 물었어요. 이에 피카소는 “천재성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
Key point
입체주의는 피카소 혼자 만든 게 아니다? 😲
아프리카 조형물로 채워진 몽마르트르의 작업실에 앉아있는 피카소.
출처 : wikimedia commons
장미 빛 시기 이후, 1907년부터 피카소는 아프리카 원시 미술에 크게 매료돼요. 또한 이때부터 입체파 운동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하죠. 그리하여 피카소는 여러 방향에서 본 사물의 모습을 한 화폭에 담아내는가 동시에, 그림에 아프리카 미술적 요소를 추가해 이전에 보여 준 적 없는 미술을 선보입니다. 🍖
* 원시 미술: 서구미술에 비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원시적인 느낌과 강렬한 보색 대비가 특징이다.
* 입체파 운동: 대상을 분석하고 분해하여 추상화된 형태로 재조립하는 형태
그 실험적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입니다.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은 아프리카 가면을 쓰고 있어요. 이 작품에 바로 엘 그레코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
(왼)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오) 엘 그레코,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1608~1614
출처 : 신동아, wikipedia
여기서 가장 파격적인 시도는 바로 원근법의 파괴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500여 년 동안 내려온 서구 미술의 전통인 원근법을 철저히 무시했어요. 평평하고 각진 다섯 여인에게 깊이와 공간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이러한 기법은 피카소가 “나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불렀던,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
폴 세잔, 사과 바구니 1895
출처 :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세잔은 본질을 탐구하여 대상을 단순하고 도형적으로 표현하고, 혁신적인 색채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어요. 위 그림을 통해 확인해 볼까요? 사과 하나하나가 조금씩 뒤틀려 보이는데요. 흔히 정물화는 사물을 한 방향에서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거잖아요? 그런데 폴 세잔은 다시점에서 본 대상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냅니다. 이것이 형태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보았죠. 🍎
이러한 세잔의 표현 방식에 영감을 받은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얼굴의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표현하는가 하면, 심지어 오른쪽 아래 여성의 몸은 뒷모습으로 그렸습니다. 😦
흔히 입체주의는 피카소, 그의 작품 중에서도 '아비뇽의 여인들'에서 시작했다고 봐요. 그런데 그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바로 폴 세잔이죠.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출처 : wikipedia
피카소 말고 폴 세잔에게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피카소의 라이벌이었던 앙리 마티스입니다. 이 내용은 15번째 아트레터, '현대 미술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편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요. 폴 세잔을 통해 피카소가 형태의 해방을 얻었다면, 마티스는 색채의 해방을 얻었어요. 💐
마티스는 사물 고유의 색을 존중하던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주로 즐거움과 행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야수주의의 거장입니다. 💃
(왼) 앙리 마티스, 앉아있는 오달리스크, 1926 (오) 파블로 피카소, 독서하는 여인, 1932
출처 : metmuseum, 1000museums
두 거장이 평생의 라이벌 관계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요. 피카소가 가장 공들여 그린 것으로 알려진 '거트루드 초상'은, 어느 날 스타인 집 벽난로 위에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 걸려있는 것을 본 피카소가 마티스보다 더 잘 그리겠다는 욕구에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당대 힘없고 가난했던 청년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부잣집 작가이자 미술 평론가예요. 💰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6
출처 : wikiart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치열하게 의식했는데요. 12살 어린 피카소가 더욱 경쟁심이 강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가 원시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마티스가 원시미술에 심취해 있다는 것을 알고 연구 과제를 빼앗으려는 의도였죠. 심지어 피카소가 세잔의 형태를 가져온 것도, 마티스가 세잔의 예술에 관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 보인 행동이었어요. 🙎 ...👀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들, 1908
출처 : wikipedia
입체주의라는 명칭은 마티스의 말에서 유래되었어요. 이는 마티스가 피카소의 친구 조르주 브라크의 풍경화를 보고, '조그만 큐브(입방체)의 축적 같다'라고 한 말에서 왔습니다. 물론 이는 조롱의 의미였죠. 🔸
브라크는 마티스와 연관된 작가 그룹에 속해 있었고, 피카소를 만나기 전까지 야수파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였어요. 그런데 피카소를 만나고 그와 함께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 데 주력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세잔을 존경하는 동시에, 당시 둘을 후원하는 칸바일러로 동일한 모티브를 갖고 있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마치 결혼한 것처럼 가깝게 지내며 자주 같이 작업하며,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 단계로 입체주의를 전개해 나가요. 🚴
(왼) 조르주 브라크, 포르투갈인, 1911 (오) 피카소,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 초상, 1910
출처 : wikiart
분석적 입체주의란 대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기하학적 모양으로 분해하고, 그 외의 것들을 배제하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인데요. 이 시기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그림은 대체로 비슷해요.
이후 조금 더 대상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종합적 입체주의가 등장합니다. 신문, 벽지, 모래, 철사와 같은 실제 물체의 요소들을 붙여, 새로운 조형 효과를 나타내는 방식이에요. 이는 현대적 콜라주로 발전하면서, 미술 재료가 아니었던 것들에 대한 예술적 가치의 인식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죠. 📰
(왼) 브라크, 과일 접시와 유리잔, 1912 (오) 피카소, '기타, 악보, 유리잔', 1912
출처 : wikipedia, researchgat
이처럼, 입체주의는 마티스와의 경쟁심으로 발단하여, 세잔이 마련한 기틀과 동료 바르크와 함께 전개해 나간 것입니다. 👪
Key point
역행하는 그림 실력? 👴 ➡ 👶
피카소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나열해 보면, 그림 실력이 역행하는 듯 보이죠? 피카소는 평생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어요. 그는 라파엘처럼 그리는 건 4년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건 평생이 걸렸다고 말했죠.
출처 : MOMA
그래서 피카소는 당시 아마추어라 조롱받는 앙리 루소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앙리 루소는 회사에 다니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다, 49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화가입니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소박파'라, 매우 서툰 그림 실력을 보여요. 사실과 다른 신체 비율은 물론, 공중 부양한 듯한 발과 일자 모양의 에펠탑을 그렸죠. 🗼
앙리 루소, 풍경 속의 자화상, 1890
출처 : wikimedia
하지만 원근법과 구도를 무시하고, 실제 같지 않은 대상의 표현은 피카소가 추구하는 미술이었습니다. 루소의 그림을 처음 본 피카소는 참신하다며 루소를 직접 만나러 갔다고 해요. 1908년에는 루소만을 위한 파티까지 열어줄 정도로 루소를 극찬했다고 하죠.
그러고 보니 루소 그림의 투박함과 어색함은 오히려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움을 줍니다. 루소는 피카소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예술가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 👏
Key point
피카소를 손절한 화가 💢
출처 : Getty Images
피카소가 사랑한 라울 뒤피, 피카소가 극찬한 프리다 칼로 등. 천재 예술가 피카소의 이름이 들어간 이 표현은, 많은 예술가의 수식어인데요. 그중 피카소가 질투한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알베르토 자코메티예요.
자코메티는 유명한 인상파 화가의 아들로, 매우 지적인 조각가였습니다. 그래서 피카소는 자코메티에게 조언과 의견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고 해요. 자코메티는 이전의 매끈하고 완벽한 비율의 조각상과 달리, 가늘고 긴 형태의 조각상을 만들었어요. 이 참신하고 새로운 시도를 피카소는 인정했죠. 😲
알베르토 자코메티, 걷는 남자, 1960
ⓒ Alberto Giacometti Estate / SACK, Seoul, 2017
그럼에도 피카소는 현대에 자코메티의 작품이 자기 작품의 경매가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한 듯, 그를 매우 시기했어요. 피카소는 그를 험담하고 다니는 것은 물론, 자신이 소속된 갤러리에 자코메티를 영입하려는 것을 극구 반대해 무산시켰죠. 심지어 자코메티가 사랑한 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빼앗으려고 하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어요. 😰
결국 피카소의 인간성에 실망한 자코메티는 피카소와 의절해요. 알고 지내는 동안 둘은 가치관에도 갈등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카소는 죽음에 가까워지자, 보고 싶은 사람으로 자코메티를 꼽았다고 해요. 😢
Key point
미술 천재의 대명사 피카소는 자신보다 잘 그리는 화가들을 모방하고,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특히 그가 꽃피운 입체파는 스승, 라이벌, 친구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피카소를 통해 모방과 창조, 긍정적인 경쟁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출처 : lvhart.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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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아트의 스페셜 인터뷰! 회화작가 정하슬린✨
포브스코리아 '30세 미만 30인'에 선정된 작가 정하슬린! 그녀의 작업세계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작가는 물감을 통해 물질과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며, 캔버스에는 다양한 질감, 색감, 무늬가 층층이 쌓여있어 관객은 작가가 의도한 레이어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그 순서를 알아내는 매력적인 경험을 할 수있다. 정하슬린 작가는 삶에서 마주친 이미지들을 채집하고 내적 아카이브에 엮어서 전달하고자 한다. 그녀는 회화가 그러한 아이디어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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