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01.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에 관한 3가지 숫자,
110,500,000
10
3,000
그의 작품 무제(Untitled)가 소더비 경매에서 일본의
패션 이커머스 조조타운의 창업자 마에자와 유사쿠에
의해 앤디 워홀의 기존 기록을 뛰어넘는 최고 가격인 110,500,000 달러로 낙찰되었다.
앤디 워홀에게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림을 10달러에
사라고 우겼던 날, 앤디 워홀이 말하길
"너무 대충 그린 그림이잖아" 바스키아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 그림도 그렇잖아요?"
바스키아는 등장과 동시에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되며 8년간 3,000여 점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하였다.
"바스키아의 유년기가 궁금해요"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피부색으로 비롯한 인종차별, 부모의 잦은 다툼 등으로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바스키아는 세상에 대한 반항을
기본 자세로 탑재했던 아이었어요.
그러다 바스키아가 7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이혼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자주 가출을 하게 됩니다.
"스프레이 캔으로 써내린 SAMO"
그렇게 집보다는 거리에서 삶을 배워가던 바스키아는 친구인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났어요. 서로 오죽 잘 맞았으면 그래피티를 같이 하면서 점차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가게 되죠.
딱 봐도 둘이 친해보이는 (좌측)바스키아 (우측) 알 디아즈
바스키아와 디아즈는 마리화나에 같이 취한 상태에서 장난스러운 문구를 만듦니다.
사적인 농담으로 시작한 "the same old crap" 를 "SAMO"로 줄이고, 이후 그 둘은 뉴욕 소호 거리에 있는 벽들에 스프레이로 "흔해 빠진 낡은 것"이라는 뜻의 SAMO
(SaMe Old Shit)에 저작권 기호를 붙인 SAMOⓒ라는 문구를 남겼는데요,
묘하게 반항적인 그래피티와 메시지가 주는 힘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흔해고 낡아 빠진 것들이 판치는 세상, 그런 세상은 죽었다."
"9to5 근무 시간에 대한 죽음"
"저 OO 대학교 나왔는데요"
SAMO는 그들이 생각한 반항이었다.
SAMO 와 그래피티로 표현된 그들의 작품은 주목을 받으면서 1980년 그룹 전시인
<타임 스퀘어 쇼(Times Square Show)>를 통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유흥가에서 만난 당신, 내 인생을 바꾸었네"
그렇게 뉴욕 안에서 나름 유명해진 바스키아는
술을 마시며 예술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1979년, 바스키아는 W.P.A. 식당에서 큐레이터로 유명한 헨리 겔트잘러와
식사 중이던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좌측) 앤디 워홀 (우측) 핸리 겔자틀러
바스키아는 자신을 신예 예술가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낙서가 담긴 엽서를 사달라고 이야기했는데요.
헨리 : "뭐야? 너는 너무 어리잖아"
그러나 워홀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워홀 : "잠깐만, 당신 엽서 내가 1달러에 살게"
워홀은 당찬 청년 바스키아의 엽서를 1달러에 구매하였습니다.
당시 앤디 워홀은 이미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성공가도를 걷고 있는
바스키아에게는 놀라운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바스키아는 맨해튼에 있는 워홀의 스튜디오이자
나이트클럽인 더 팩토리를 방문했습니다.
앤디워홀은 훗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1982년 10월 4일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가 바스키아를 데려왔다.
그리니치빌리지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SAMO(세이모)'라는 이름을 쓰는 그 아이다.
나는 그에게 10달러를 쥐여줬고,
그가 그림을 그린 티셔츠를 세렌디피티에서 팔아볼 수 있게 주선해 준 적도 있다.
그는 나를 귀찮게 하는 그런 유형의 아이였다.
이미 유명했던 앤디워홀에게 바스키아는 수많은 스타작가 워너비 중
한 명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바스키아의 예술성은 대중들과 미술 전문가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앤디 워홀은 마침내 바스키아를 인정하게 됩니다.
<뉴욕, 뉴욕>, 1981,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스프레이 페인트, 은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콜라주, 128.3×226.1cm
ⓒ Jean-Michel Basquiat 재단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1983년 9월 13일
바스키아가 찾아왔다. ... 담배 한 갑을 사고 싶어서 자기 그림을 75센트에 팔았는데 일주일 뒤에 그의 갤러리에서 전화가 와서는 똑같은 그림을 자기네는 1000달러에 샀다고 말했다.
바스키아는 그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건 웃기는 일이다.
그는 자기 그림을 2달러에 살 사람이 혹시 있나 찾아보고 있었다.
요즘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15000달러에 팔리고 있다.
정작 그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작품을 2달러에 사 줄지 궁금해한다.
(좌측) 앤디 워홀 (우측) 장 미셸 바스키아
"전성기의 바스키아가 그려낸 작업들이 궁금해"
세상이 싫던 반항아의 꼬마아이는 어느덧, 20대 중반의 청년이 되었네요.
미국 미술의 중심인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치게 됩니다.
바스키아는 아크릴,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텍스트와 드로잉을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01. 컷업기법(CUT-UP) 기법
Jean-Michel Basquiat, Beat Bop, 1983, 앨범 표지(앞면 및 뒷면), Tartown Records, 12 ½ × 12 ½ 인치(32 × 32cm)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스키아가 글을 쓰고 지운 흔적이 보이곤 합니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는 작업 방식은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1914~1997)의 글씨를 쓰고, 지우고, 재배열하는
컷 업(Cut-up)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02. 말장난
"나는 더 잘 볼 수 있게 하려고 단어들에 선을 그어 지워버린다."
- 장 미쉘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말장난을 좋아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단어와 구를 지우고 반복했으며 잘못된 철자까지 사용했습니다.
또는 텍스트와 드로잉의 조합을 통해 뉴욕 풍경과, 자신의 내면을 혼합하여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집보다는 거리에서 삶을 배워가던 바스키아는
친구인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났어요. 서로 오죽 잘
맞았으면 그래피티를 같이 하면서 점차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가게 되죠.
딱 봐도 둘이 친해보이는 (좌측)바스키아 (우측) 알 디아즈
바스키아와 디아즈는 마리화나에 같이 취한 상태에서
장난스러운 문구를 만듦니다.
사적인 농담으로 시작한 "the same old crap" 를 "SAMO"로 줄이고, 이후 그 둘은 뉴욕 소호 거리에 있는 벽들에 스프레이로 "흔해 빠진 낡은 것"이라는 뜻의 SAMO(SaMe Old Shit)에 저작권 기호를 붙인 SAMOⓒ라는 문구를 남겼는데요,
묘하게 반항적인 그래피티와 메시지가 주는 힘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흔해고 낡아 빠진 것들이 판치는 세상, 그런 세상은 죽었다."
"9to5 근무 시간에 대한 죽음"
"저 OO 대학교 나왔는데요"
SAMO는 그들이 생각한 반항이었다.
SAMO와 그래피티로 표현된 그들의 작품은 주목을
받으면서 1980년 그룹 전시인 <타임 스퀘어 쇼(Times Square Show)>를 통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유흥가에서 만난 당신,
내 인생을 바꾸었네"
그렇게 뉴욕 안에서 나름 유명해진 바스키아는
술을 마시며 예술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1979년, 바스키아는 W.P.A. 식당에서 큐레이터로 유명한 헨리 겔틀잘러와 식사 중이던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좌측) 앤디 워홀 (우측) 핸리 겔자틀러
바스키아는 자신을 신예 예술가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낙서가 담긴 엽서를 사달라고 이야기했는데요.
헨리 : "뭐야? 너는 너무 어리잖아"
그러나 워홀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워홀 : "잠깐만, 당신 엽서 내가 1달러에 살게"
워홀은 당찬 청년 바스키아의 엽서를 1달러에
구매하였습니다. 당시 앤디 워홀은 이미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성공가도를 걷고 있는 바스키아에게는 놀라운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바스키아는 맨해튼에 있는 워홀의 스튜디오이자 나이트클럽인 더 팩토리를 방문했습니다.
앤디워홀은 훗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1982년 10월 4일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가 바스키아를 데려왔다.
그리니치빌리지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SAMO(세이모)'라는 이름을 쓰는 그 아이다.
나는 그에게 10달러를 쥐여줬고,
그가 그림을 그린 티셔츠를 세렌디피티에서 팔아볼 수 있게 주선해 준 적도 있다.
그는 나를 귀찮게 하는 그런 유형의 아이였다.
이미 유명했던 앤디워홀에게 바스키아는 수많은 스타작가 워너비 중 한 명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바스키아의 예술성은 대중들과 미술 전문가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앤디 워홀은
마침내 바스키아를 인정하게 됩니다.
<뉴욕, 뉴욕>, 1981,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스프레이 페인트, 은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콜라주, 128.3×226.1cm
ⓒ Jean-Michel Basquiat 재단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1983년 9월 13일
바스키아가 찾아왔다. ... 담배 한 갑을 사고 싶어서 자기 그림을 75센트에 팔았는데 일주일 뒤에 그의 갤러리에서 전화가 와서는 똑같은 그림을 자기네는 1000달러에 샀다고 말했다.
바스키아는 그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건 웃기는 일이다.
그는 자기 그림을 2달러에 살 사람이 혹시 있나 찾아봤다.
요즘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15000달러에팔리고 있다.
정작 그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작품을 2달러에 사 줄지 궁금해한다.
(좌측) 앤디 워홀 (우측) 장 미셸 바스키아
"전성기의 바스키아가 그려낸
작업들이 궁금해"
세상이 싫던 반항아의 꼬마아이는 어느덧, 20대 중반의 청년이 되었네요. 미국 미술의 중심인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치게 됩니다.
바스키아는 아크릴,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텍스트와 드로잉을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01. 컷업기법(CUT-UP) 기법
Jean-Michel Basquiat, Beat Bop, 1983, 앨범 표지(앞면 및 뒷면), Tartown Records, 12 ½ × 12 ½ 인치(32 × 32cm)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스키아가
글을 쓰고 지운 흔적이 보이곤 합니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는 작업 방식은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1914~1997)의 글씨를 쓰고, 지우고, 재배열하는
컷 업(Cut-up)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02. 말장난
"나는 더 잘 볼 수 있게 하려고 단어들에 선을 그어 지워버린다."
- 장 미쉘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말장난을 좋아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단어와 구를 지우고 반복했으며 잘못된
철자까지 사용했습니다. 또는 텍스트와 드로잉의 조합을 통해 뉴욕 풍경과, 자신의 내면을 혼합하여 표현했습니다.
비싸게 팔린 바스키아 작품
TOP 5
27세에 요절한 천재 화가, 바스키아의 작품에 대해 어떤 박물관은 “Jean-Michel Basquiat의 그림을 갖는 것은 보관 비용 가치조차 없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바스키아의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그림들 중 하나이죠. 1980년대 초반의 작품들이 시장에서 가장 선호되고 있으며, 바스키아의 가장 비싼 작품들은 모두 이 시기에 나온 것들입니다. 이 몇 년 동안 바스키아는 그래피티 예술가에서 훌륭한 예술가로 폭발적인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역대 최고가 작품 5개입니다.
NO. 5
Dustheads, 1982
강렬하고 먹음직스러운 검은색을 배경으로, 이 작품 속 밝은 색상의 인물들은 예술가의
작품을 대표하게 된 표현적인 선, 색상, 형태의 궁극적인 미학을 나타낸다.
2013년, 더스트헤드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4,800만 달러(약 594억 원) 이상에 팔렸다.
바스키아의 초기 딜러 중 한 명인 토니 샤프라지로부터 획득되었다. 그런데 이 그림의
구매자인 말레이시아 사업가 조 로우는 돈세탁 계획에 연루되어 현재 도주 중이다. 2016년, 그는 1300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 매각했다.
NO. 4
Versus Medici, 1982
1980년대 초, 바스키아는 이탈리아 모데나에 두 개의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곳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의 작업실 조수 스테판 토르톤에 따르면, 그는 1494년 메디치 왕조를 전복시킨
도미니카 수도회 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게 매료되었고, 그것이 이 그림의 주제가
유래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 제목에서 서양의 예술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바스키아가 갈망하던 1982년에 그려졌다. 2021년 5월 소더비에서 5080만 달러 (약 629억 원)에 판매되었다.
NO. 3
Untitled(Devil), 1982
폭이 16피트가 넘고 높이가 거의 8피트에 달하는 그것은 또한 화가의 가장 큰 캔버스 중 하나이다. 바스키아가 겨우 22살이었을 때 만들어진, 중심 인물은 충동적인 붓놀림과 풍부한 색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악마이다. 거리 예술가에서 스튜디오로 경력을 바꾼 바스키아의 오마주에서 이 극적인 인물은 캔버스를 지배하고 있으며, 표현적인 제스처의 폭발 속에서 자신을 악마로 묘사하는 바스키아의 영웅적인 자화상이라고 한다. 보는 사람은 악마의 매혹적인 시선에 사로잡혀 최면에 걸린다. 이 그림은 1981년과 1982년 봄에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보낸 두 시기 동안 바스키아가 그린 그림 시리즈 중 가장 큰 작품이다. 마에자와는 2022년 5월 필립스에서 8,500만 달러(약 1,054억 원)에 판매되었다.
NO. 2
In this Case, 1983
바스키아의 3부작 대형 두개골 작품 중 마지막 작품으로, 어린 시절부터 인간 해부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다. 이것들 중 하나는 L.A.의 브로드 박물관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그림이다. 원래 발렌티노의 공동 설립자인 잔카를로 지암메티의 컬렉션에
있었는데, 2021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9310만 달러를 달성하여 5천만 달러의
추정치를 거의 두 배로 늘렸다.
NO. 1
Untitled, 1982
2017년 뉴욕 소더비 컨템포러리 아트 경매에서 '무제'(1982)가 1억150만 달러(약 1243억 원)에 낙찰되면서 그동안의 바스키아의 작품 경매 기록이 깨졌다. 파란색 배경에 맞춰진 강렬한 윤곽의 두개골은 미국 예술가가 경매한 작품 중 두 번째로 비싼 작품이다.
27세에 요절한 천재 화가, 바스키아의 작품에 대해 어떤 박물관은 “Jean-Michel Basquiat의 그림을 갖는 것은 보관 비용 가치조차 없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바스키아의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그림들 중 하나이죠. 1980년대 초반의 작품들이 시장에서 가장 선호되고 있으며, 바스키아의 가장 비싼 작품들은 모두 이 시기에 나온 것들입니다. 이 몇 년 동안 바스키아는 그래피티 예술가에서 훌륭한 예술가로 폭발적인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역대 최고가 작품 5개입니다.
NO. 5
Dustheads, 1982
강렬하고 먹음직스러운 검은색을 배경으로, 이 작품 속 밝은 색상의 인물들은 예술가의 작품을 대표하게 된 표현적인 선, 색상, 형태의 궁극적인 미학을 나타낸다.
2013년, 더스트헤드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4,800만 달러(약 594억 원) 이상에 팔렸다.
바스키아의 초기 딜러 중 한 명인 토니 샤프라지가 획득했는데, 이 그림의 구매자인 말레이시아 사업가 조 로우는 돈세탁 계획에 연루되어 현재 도주 중이다. 2016년, 그는 1300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 매각했다.
NO. 4
Versus Medici, 1982
1980년대 초, 바스키아는 이탈리아 모데나에 두 개의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곳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의 작업실 조수 스테판 토르톤에
따르면, 그는 1494년 메디치 왕조를 전복시킨
도미니카 수도회 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게
매료되었고, 그것이 이 그림의 주제가 유래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 제목에서 서양의 예술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바스키아가 갈망하던 1982년에
그려졌다.
2021년 5월 소더비에서 5080만 달러 (약 629억 원)에 판매되었다.
NO. 3
Untitled(Devil), 1982
폭이 16피트가 넘고 높이가 거의 8피트에 달하는 이 작품은 화가의 가장 큰 캔버스 중 하나이다. 바스키아가 겨우 22살이었을 때 만들어진, 중심 인물은 충동적인 붓놀림과 풍부한 색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악마이다.
거리 예술가에서 스튜디오로 경력을 바꾼 바스키아의
오마주에서 이 극적인 인물은 캔버스를 지배하고 있으며, 표현적인 제스처의 폭발 속에서 자신을 악마로 묘사하는 바스키아의 영웅적인 자화상이라고 한다. 보는 사람은
악마의 매혹적인 시선에 사로잡혀 최면에 걸린다. 이
그림은 1981년과 1982년 봄에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보낸 두 시기 동안 바스키아가 그린 그림 시리즈 중 가장 큰
작품이다. 마에자와는 2022년 5월 필립스에서 8,500만 달러(약 1,054억 원)에 판매되었다.
NO. 2
In this Case, 1983
바스키아의 3부작 대형 두개골 작품 중 마지막 작품으로, 어린 시절부터 인간 해부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다. 이것들 중 하나는 L.A.의 브로드 박물관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그림이다. 원래 발렌티노의 공동 설립자인 잔카를로 지암메티의 컬렉션에 있었는데, 2021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9310만 달러를 달성하여 5천만 달러의 추정치를 거의 두 배로 늘렸다.
NO. 1
Untitled, 1982
2017년 뉴욕 소더비 컨템포러리 아트 경매에서
'무제'(1982)가 1억150만 달러(약 1243억 원)에
낙찰되면서 그동안의 바스키아의 작품 경매 기록이
깨졌다. 파란색 배경에 맞춰진 강렬한 윤곽의 두개골은
미국 예술가가 경매한 작품 중 두 번째로 비싼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