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31 살롱 밖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화가, 에두아르 마네 |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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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31 살롱 밖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화가,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Nadar.


어떤 그림은 한 시대를 통째로 흔들어버립니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논쟁의 중심에 서며, 때로는 사회적 스캔들까지 불러일으키기도 하죠.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에도 그런 그림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고전의 틀 안에서 안정을 찾던 시대, 현실의 민낯을 정면으로 마주한 한 화가가 있었죠. 그는 신화도, 역사도 아닌 당대의 인물과 풍경을 화폭에 올리며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킵니다. 바로, 에두아르 마네였죠. 마네는 전통을 깬 화가였습니다. 동시에, 근대의 문을 연 화가였죠. 현실을 밀어 넣은 그의 붓질은 인상주의의 문을 열었고, 이후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가 허문 문턱을 따라 들어왔습니다.


당시 미술계는 '아카데미즘'이라는 제도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신화, 역사, 종교처럼 고상한 주제를 이상화해 그리는 것이 예술의 정석으로 여겨졌죠. 하지만 마네는 그런 이상에 반기를 듭니다. 그는 당대의 현실과 그 안의 모순, 생생한 장면을 담아야 한다고 믿었죠. 과거가 아닌 현재를 향한 그의 그림은 결국 현대미술로 향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레터에서는 마네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는지, 그리고 그 충격이 어떻게 새로운 예술의 시작이 되었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고상한 아름다움보다는 진실을 그린 화가


Édouard Manet, Portrait of Monsieur and Madame Auguste Manet, 1860. ©Musée d'Orsay.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1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법관, 어머니는 외교관 집안 출신으로,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죠. 집안 분위기만 보면 법전을 들고 살아가는 길이 더 어울렸을지 모르겠지만, 마네는 달랐습니다. 삼촌의 손을 잡고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며 그림에 빠졌고, 훗날 아내가 되는 수잔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예술적 감각을 넓혀갔죠. 공부엔 흥미도 재능도 없었지만, 그림 앞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했습니다. 하지만 마네가 예술가가 되겠다는 말에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합니다. 결국 마네는 견습 선원이 되어 남미까지 항해를 떠나고, 해군학교에 응시하지만 낙방하죠. 그렇게 방황하던 그는 결국 자신이 가장 원하는 길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850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아카데미 화풍을 가르치던 토마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정식으로 미술 수업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수업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전통을 중시하던 스승의 방식은 마네에게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죠. 마네는 곧 루브르 박물관에 틀어박혀 옛 거장들의 그림을 독학하며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등지를 여행하며 직접 명화를 모사하기도 했죠. 특히 벨라스케스와 프란스 할스 등 스페인과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네는 태생부터 달랐습니다.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상속받은 유산은 그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었죠. 고객의 기호에 맞춰 그림을 그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그 자유를 온전히 표현에 쏟아붓습니다. 그가 눈을 돌린 건 도시의 거리,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무심한 일상의 장면이었습니다. 그가 주목한 건 우아해 보이는 상류층의 허위와 위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직설적이기보다는 암시적으로,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되었죠. 그래서일까요? 마네의 그림을 보면 어디가 불편한지 딱 잘라 설명하긴 어려운데 묘하게 시선을 붙잡는 힘이 있습니다. 이처럼 마네는 고전과 근대 사이에서 자신만의 회화를 밀어붙였습니다. 그림 같지 않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살롱 전시에서는 번번이 낙선했죠.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보는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리는 데 집중했죠. 그렇게 마네는 인상주의와 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가 됩니다. 당시엔 낯설고 파격적이었던 그의 그림이, 오늘날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현대 회화'의 시작점이 되었던 겁니다.


낙선전의 스타, 예술계의 문제작

 

마네의 초기 화풍에는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짙게 묻어납니다. 1859년 첫 살롱전에 입선한 이후 마네는 꾸준히 출품했지만, 낙선이 반복됐죠. 그럼에도 시인 보들레르가 그의 가능성을 알아봤습니다. 보들레르는 마네를 '근대 생활의 화가'라 부르며 주목했죠. 당시 파리는 빠르게 근대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고, 마네는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도시의 표정, 순간의 풍경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신화나 역사처럼 고귀한 소재가 미술의 정석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그는 현실의 인물과 장면을 대담한 구도로 그려내며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했죠. 자연스레 그의 작품은 논란의 중심에 섰고, 파리 화단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마네는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지만, 이를 철저히 근대적인 방식으로 변주했습니다. 신화적 이상화를 벗기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는 전통적인 명암이나 원근 표현은 과감히 생략했고, 평면적인 색면과 거친 붓질로 인물을 그려냈습니다. 마네는 시선을 멈칫하게 만드는 구성을 택했습니다. 고귀함보다 솔직함을, 장식보다 날것의 현실을 담아냈죠. 덕분에 그의 그림은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이전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을 전달했습니다.


Édouard Manet, Le Déjeuner sur l'herbe, 1863. ©Musée d'Orsay.


이러한 실험정신은 대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당시 파리 미술계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두 명의 옷 입은 남성과 한 명의 나체 여성이 풀밭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장면은 그 자체로 파격적이었죠. 특히 나체 여인이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 당시에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고전 누드의 '수동적인 시선'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기 때문인데요. 당대의 관습 속에서 나체는 어디까지나 신화 속 여신이나 이상적 존재로만 허용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현실의 여성을 아무렇지 않게 누드로 등장시킨 것, 그리고 그런 그녀가 관람객을 응시한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꽤나 도발이었죠. 더욱이 모델이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은 논란을 키웠습니다.


Giorgione and/or his disciple Titian, Le Concert champêtre, 1509. ©WIKIPEDIA.

Raffaello Sanzio(design) and Marcantonio Raimondi (engraving), The Judgement of Paris, c.1510-1520.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전통 회화의 양식을 빌려 새로운 내용을 담은 작품이었습니다. <전원의 합주>나 <파리스의 심판>같은 르네상스 회화의 구도, 프랑스 로코코의 '우아한 연회' 장르에서 전원 유희의 외형을 빌려왔지만, 그 안에는 현실적인 불편함과 도발이 담겨 있었죠. 마네는 이 작품을 살롱에 출품했지만 거절당합니다. 보수적인 심사 기준이 문제였죠. 대신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마련된 '낙선전(Salon des Refusés)'에 참여해 작품을 공개했고, 거기서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도덕적이지 못하며, 미적 기준을 벗어났다는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만큼 이 작품은 강한 인상을 남겼고, 마네는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 인물로 부상합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오늘날 모더니즘 회화의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죠.


비너스가 아닌 현실의 여성을 그리다


Tiziano Vecellio, Venus of Urbino, 1534. ©Uffizi.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La Grande Odalisque, 1814. ©Louvre.


겁을 먹고 한발 물러설 법도 하지만, 마네는 오히려 더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을 내놓았죠. 바로 <올랭피아>입니다. 이 그림은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발표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완성된 작품입니다. 타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나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처럼 고전 누드화를 연상시키는 구도를 빌렸지만, 표현 방식은 전혀 달랐죠.


Édouard Manet, Olympia, 1863. ©Musée d’Orsay.


기존의 누드화는 대부분 신화 속 여신을 이상화한 것이었습니다. 감상자는 아름다움을 보되, 그 대상과는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었죠. 하지만 마네는 그 거리 자체를 거부합니다. 침대 위, 화면 정중앙에는 한 여성이 강한 눈빛으로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올랭피아'로, 당시 성매매 여성들이 자주 쓰던 이름이었죠. 그녀는 꾸밈없는 맨몸으로 시선을 마주하고, 옆에선 흑인 하녀가 누군가 보낸 꽃다발을 건네고 있습니다. 발치에는 순결을 상징하는 강아지가 아닌,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치켜세운 채 앉아 있죠. 이 고양이는 성적 도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녀가 착용한 벨벳 초커도 당시 성매매 여성의 상징이었고요. 기존의 누드화가 신화의 베일로 현실을 덮었다면, 마네는 그 베일을 벗기고 생생한 현실을 드러냈습니다. 화면의 붓질 또한 달랐습니다. 매끈한 아카데미식 화풍과 달리, 마네는 평면적이고 거친 터치로 침대의 천과 그림 전체를 마감했죠. 익숙한 이상화 대신, 불편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1865년 살롱전에 <올랭피아>가 전시되자 반응은 참혹했습니다. "색이 조잡하다", "왜 저런 여자를 그렸느냐"라는 비난이 이어졌고, 그림을 조롱하거나 훼손하려는 관람객까지 등장했죠. 겉으론 고상한 체하면서 뒤로는 이중적인 삶을 살던 상류층에게, <올랭피아>는 거울처럼 불편한 그림이었을 겁니다. 


Victorine Meurent, Le Jour des Rameaux, 1885. ©Musée d'art et d'histoire du Judaïsme.


흥미로운 건, 이 그림의 모델이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도 등장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이름은 '빅토린 뫼랑'으로, 당시 몇 차례 살롱전에 입선한 화가 지망생이었는데요. 하지만 대중에게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마네는 열등감으로 인해 점차 그녀와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녀를 '올랭피아의 모델'로 기억하고 있죠. 그림 속에서 자신을 내보이고, 정면을 응시했던 주체적인 인물은 결국 현실에서는 마네의 그림자처럼 잊힌 느낌인데요. 이것 또한 어쩐지 씁쓸한 아이러니 같네요.


살롱 밖에서 미술계의 흐름을 뒤집은 사람


Édouard Manet, The Monet Family in Their Garden at Argenteuil, 1874.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 그림들은 젊은 화가들에게 자극이 되었죠. 그리고 그 자극은 곧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의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마네가 열어젖힌 문턱을 넘어 더 멀리 나아갔습니다. 기존 회화처럼 화실에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빛과 공기를 느낄 수 있는 현장에서 바로 그림을 그렸죠. 역사적인 서사보다는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장면, 순간의 빛을 담아냈고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그림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고 자유로웠습니다. 과거에는 균형 잡힌 구성이 미덕이었다면, 인상주의자들은 오히려 '우연히 찍힌 듯한' 구도를 택했죠. 인물이 화면 밖으로 잘려 나가거나, 풍경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장면도 흔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구성은 당시 사람들에게 낯설게 다가왔고, 인상주의 전시를 풍자하는 유머나 만평이 쏟아지기도 했죠.


하지만 그 낯섦은 곧 변화의 시작이 되었고, 인상주의는 20세기 회화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화가들은 각자의 표현 방식을 탐색하기 시작했죠. 기존의 아카데믹한 양식을 넘어, 현실의 모습과 자연의 찰나를 화폭에 담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변화의 시작점에는 마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명암이나 원근을 최소화하고, 평면적인 색 면과 대담한 구도를 통해 회화를 현실의 창이 아닌, '회화 그 자체'로 바라보게 했죠. 인상주의자들이 그를 선구자로 여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네는 전통 미술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고, 그 정신은 수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네는 인상파 전시회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살롱전에 출품하며, 공식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고자 했죠. 인상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도 자신이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꺼렸고, 직접적인 참여보다는 바깥에서 그 흐름에 자극을 준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살롱에서 단 한 번도 대상을 받지 못했지만,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는데요. 말년에는 색채와 빛에 대한 감각이 또렷해지며, 왜 그가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지 스스로 증명해 나가죠.


Édouard Manet, Claude Monet Painting in his Studio, 1874. ©Neue Pinakothek.


마네와 모네, 이름도 시기도 비슷했던 두 사람은 종종 혼동되곤 했습니다. 실제로 1870년대, 모네가 상을 받았을 때 축하 인사를 받은 건 마네였죠. 이 해프닝은 마네가 생전 얼마나 평가절하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비록 그는 끝내 그토록 원하던 상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를 19세기 미술을 통째로 바꿔놓은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Édouard Manet, Le Fifre, 1866. ©Musée d'Orsay.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피리 부는 소년>은 지금도 교과서에서 익숙한 그림입니다. 모델은 나폴레옹 3세 친위대의 10대 군악대원으로, 마네가 직접 섭외해 그린 인물이죠. 이 그림은 단순한 배경과 뚜렷한 윤곽선 덕에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인물의 존재감을 강조합니다. 발 아래 그림자도 거의 없고, 배경은 텅 비어 있어 인물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하죠. 하지만 그만큼 시선은 소년에게 집중되고 마네 특유의 실험적인 구도와 붓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 역시 살롱에서 낙선했습니다. "바지 주름이 성의 없고 배경이 없다"라는 식의 비난이 이어졌고, 마네는 또다시 공식 미술계의 벽을 실감하게 되죠.


Édouard Manet,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8-1869. ©Kunsthalle Mannheim.


Francisco de Goya, El 3 de mayo en Madrid, 1814. ©Museo del Prado.


예술이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믿었던 마네는, 이듬해 더 도발적인 주제를 들고나옵니다. 1867년, 프랑스가 멕시코에 세운 정부가 무너지고, 황제로 내세운 막시밀리안 대공이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외면했지만 마네는 달랐죠. 그는 무려 1년 반 동안 이 사건을 주제로 유화 4점과 석판화 1점을 완성하며, 회화로 제국주의를 고발합니다. 바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연작이죠. 총살대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제복을 입고 있고, 총을 장전하는 병사의 얼굴은 나폴레옹 3세를 닮았습니다. 명백한 정치적 메시지였죠. 마네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구도를 빌려, 관람자가 마치 그 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것처럼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Édouard Manet,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7. ©Museum of Fine Arts.

Édouard Manet,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7-1868. ©National Gallery.

Édouard Manet,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7. ©Ny Carlsberg Glyptotek.

초기 버전은 신문 기사에 의존해 다소 조잡한 묘사를 담고 있지만, 거친 붓 터치에는 사건을 접한 마네의 분노와 혼란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실물 자료를 접하고 나서 그린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에서는 병사들의 제복과 막시밀리안의 표정까지 더욱 선명해지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죠. 이 연작은 프랑스 정부의 검열에 걸려 전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판매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림들은 그의 작업실 한쪽에 조용히 쌓여 있었죠. 결국 유일하게 남은 최종판은 1879년 뉴욕에서 처음 공개됩니다. 마네의 전복은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는 태도 그 자체였음을 다시금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Édouard Manet, Portrait of Emile Zola, 1868. ©Musée d'Orsay.


"사람들은 마네의 그림들이 살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있다.
그의 작품은 벽을 폭파해 구멍을 내버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내가 소리 높여 말한다.
미래에는 마네가 거장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내가 부자라면 바로 오늘, 마네의 전 작품을 구입하고도 값이 싸다고 생각했을 텐데"
- 에밀 졸라


마네가 끝내 꺾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몇몇 든든한 지지자들 덕분이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작가 에밀 졸라였는데요. 졸라는 마네를 '시대의 진실을 직시하고 증언하는 예술가'로 보았고,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앞장서서 변호했습니다. <피리 부는 소년>이 낙선했을 때는, 신랄한 평론으로 마네를 감싸며 자신이 대신 화살을 맞기도 했습니다. 졸라는 아무도 말하지 않던 것을, 기꺼이 말해준 사람이었죠. 마네는 그런 졸라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초상화를 그립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졸라의 뒤로는 <올랭피아>가 걸려 있고, 한쪽에는 일본 병풍이, 다른 한쪽에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놓여 있습니다. 이 한 장의 그림에는 마네가 걸어온 길,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는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죠.


A photograph of Art Gallery owner, Paul Durand-Ruel. ©THE MERCURY.


또 다른 든든한 후원자는 예술상인 폴 뒤랑뤼엘이었습니다. 그는 살롱 중심의 아카데미 체계 밖에서 새로운 미술 흐름을 뒷받침한 인물이죠. 마네 역시 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작품을 사주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등 화단 밖에서도 마네가 창작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었죠.


Édouard Manet, Spring, 1881. ©J. Paul Getty Museum.


1881년, 마네는 후기 대표작 중 하나인 <봄>을 발표합니다. 사계절을 주제로 기획한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이었죠. 모델은 당시 파리의 여배우 잔느 드 마르시로, 흰 드레스에 꽃무늬 보닛을 쓴 그녀는 파란 하늘과 초록 잎 사이에서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배경과 따로 놀지 않고 한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죠. 이 작품은 마치 인물화와 풍경화가 만난 듯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빛과 계절,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려 했던 마네의 시도가 담겨 있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그의 화풍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초기의 전복성과 긴장감은 누그러졌고, 그 자리에 밝고 유려한 색감과 인상주의적 표현이 스며들어있죠. 이듬해, <봄>은 파리 살롱전에 출품되어 보기 드물게 호평을 받습니다. "마네가 마침내 대중의 마음을 얻었다"라는 평가가 따랐죠. 하지만 마네는 이 사계절 연작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작품 <가을>을 남긴 뒤, 1883년 봄,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리고 훗날, 2014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6,500만 달러에 낙찰되며 마네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하게 됩니다. 현재는 로스엔젤레스의 게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죠. 


Édouard Manet, Un bar aux Folies Bergère, 1882. ©Courtauld Gallery.


마네가 생애 마지막으로 완성한 대표작은 1882년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입니다. 샹젤리제에 위치한 화려한 유흥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림 속 분위기는 묘하게 고요합니다. 관객과 마주한 바텐더는 정면을 바라보지만, 거울 속 그녀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죠. 무표정한 얼굴과 살짝 처진 어깨는 말없이 이야기합니다. 북적이는 공간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외로워 보이는데요. 마네는 그 이질감을 통해 근대 도시의 고독을 포착했습니다. 이 그림은 인상주의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주제는 더 내밀하고 깊어졌습니다. 찰나의 빛과 색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스며든 감정과 시대의 공기까지 담으려 했죠. 바텐더의 시선 너머에는 '지금 이 도시를 살아가는 개인'이라는 마네의 시선이 숨어 있습니다.


그림의 구성 역시 흥미롭습니다. 관객과 마주한 바텐더의 뒤 거울에는 그녀의 뒷모습과 그녀를 마주한 남성의 모습이 동시에 비치죠. 당시 사람들은 "이 반사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마네는 미술의 기본도 모른다"라며 조롱했고, 이 그림은 한동안 미술학도들의 토론 주제가 됩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한 사진 전문가가 실제 술집 구조를 재현해 같은 장면을 촬영하면서 비로소 마네의 억울함이 풀리게 되었죠.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1862년 살롱전에 출품된 마네의 마지막 발표작입니다. 놀랍게도 이번엔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졌고,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했죠. 마네는 생전에 처음으로 대중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을 믿는 용기


1883년, 마네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년에는 류머티즘으로 고통받았지만, 붓을 놓지 않았죠. 섬세한 작업이 어려워지자 파스텔로 전환해가며 끝까지 창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죽기 2년 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으며, 마침내 예술가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죠. 마네는 끝까지 양가적인 존재였습니다. 살롱에 꾸준히 출품하면서도, 누구보다 과감하게 기존 예술의 규범을 깨뜨렸죠. 신화나 역사 대신 거리의 사람들을, 이상화된 누드 대신 현실적인 육체를 그렸습니다. 그는 자주 비난받았고, 오해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의 눈을 믿었습니다. 본 것을, 자신의 식대로 그리겠다는 고집은 많은 것을 잃게도 했지만 결국 현대 미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짧은 생이었지만 마네는 420여 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 안에는 시대를 바라보는 한 인간의 고뇌와 용기가 담겨 있죠.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도 '지금'을 가장 열심히 바라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네의 그림 앞에서 익숙함에 기대지 않는 용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의 눈을 믿고 있나요? 그렇다면 무엇을 그대로 보고 있나요. 언젠가 프랑스에 가게 된다면, 파리에 위치한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마네의 그림을 통해 여러분만의 시선도 선명해질지 모르니까요. 그럼, 오늘의 레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르다는 이유로 주저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나아가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 보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에두아르 마네는 현실을 직시하는 대담한 그림으로 전통을 깨고 근대 미술의 문을 연 인물입니다.

2. 마네는 이상화된 과거가 아닌 생생한 현재를 그리며 현대미술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3.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마네는 전통 교육에 반발하며 독학과 여행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습니다.

4. 경제적 자유를 바탕으로 마네는 도시의 일상과 위선을 세련되게 비판하며 자신만의 회화를 밀어붙였습니다.

5. 마네는 평면적인 색 면과 거친 터치로 근대적인 감각을 실현하며 당시 미술계에 논란과 충격을 안겼습니다.

6.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나체 여성의 당당한 응시로 기존 누드의 관습을 깨뜨리며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7.  <올랭피아>는 이상화를 벗은 현실의 여성 누드를 통해 상류층의 위선을 드러내고 미술계의 논란을 촉발했습니다.

8. 마네의 실험은 인상주의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의 해방적인 정신은 현대 회화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9.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화려함 속의 고독을 포착하며 마네가 감정과 시대를 그려낸 후기 걸작입니다.

10. 말년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마네는 끝내 예술계의 인정을 받으며, 현대 미술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처: Courtauld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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