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li on deck of S S Normandie docking in NYC, 1936. ⓒNYSocialMedia.
예술은 감각의 싸움이지만, 시대를 꿰뚫는 눈과 대중을 끌어당기는 전략이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중에서도 살바도르 달리는 이 두 감각을 가장 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었습니다. 달리는 자신의 외모와 언행,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모두 계산된 전략으로 활용했습니다. 콧수염 하나, 복장 하나까지도 자신을 상징하는 요소로 만들었죠. 달리는 늘 같은 스타일의 제복을 입고 언론 앞에서는 오만할 정도로 확신에 찬 태도를 보였습니다. 심지어 지하철역에서 개미핥기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며 시선을 끄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죠. 이렇듯 달리는 언론을 무대로, 대중을 관객 삼아 ‘살바도르 달리’라는 캐릭터를 연출했습니다.
Salvador Dali in Barcelona, Spain on May 24, 1966. ⓒJack Mitchell/Getty Images.
달리는 누구보다 일찍 깨달았습니다. ‘이상하고 기묘한 것’이 곧 주목을 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걸요. 그리고 그 흐름을 타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래 남을 캐릭터를 구축했습니다. 그 결과, 달리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와 브랜드가 참고하는 마케팅의 아이콘이 되었죠.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달리는 어떤 인물일까요? 그리고 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브랜드로 만들었을까요? 오늘의 레터에서는 브랜드가 되어버린 예술가, 살바도르의 달리에 대해 들여다보겠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 세상이 열광하는 괴짜로
Salvador Dalí, 1939. ⓒCarl Van Vechten.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예술계의 이단아였습니다. 1904년, 그는 스페인 북동부의 해안 도시 피게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달리는 유치원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8세에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며 정식으로 예술 수업을 받게 되죠.
이쯤에서 달리의 삶이 순탄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지만, 그의 유년기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달리에게는 그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난 형이 있었습니다. 형을 잃어 상심한 부모님은 달리를 형의 환생으로 여기며 동일시했죠. 죽은 형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했던 그는 정체성 혼란, 강박, 편집증, 애정 결핍에 시달렸습니다. 여기에 어머니의 우울증까지 더해져 달리는 보호자에 가까운 역할을 해야 했죠. 불안정한 유년기는 달리의 내면 깊이 각인되어 일탈과 기행, 예술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죽은 형의 초상 Portrait de mon frère mort》입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형을 기리며 제작한 작품으로, 달리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보다 예술로 승화시켰음을 보여주죠. 그는 “비극적인 유년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퍼포먼스를 예술의 일부로 끌어올리곤 했습니다.
Salvador Dalí, Portrait de mon frère mort, 1939. ⓒThe Gala Dali Foundation.
달리는 괴짜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선천적인 재능과 함께 어릴 적부터 압도적인 드로잉 실력을 보였죠. 10대 시절에는 이미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켰습니다. 마드리드 미술학교 시절에는 “교수들이 내 그림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죠. 결국 달리는 퇴학당하지만, 그 오만함조차도 실력이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혼란과 천재성을 동시에 지녔던 달리는, 자기 내면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삶을 재구성해 나갔습니다.
이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무의식
Salvador Dalí, The Enigma of My Desire, 1929. ⓒdalipaintings.
미술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가족과의 관계도 순탄하지 않았던 불안한 유년기. 달리는 종종 꿈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곤 했습니다. 하지만 불안은 오히려 그를 더 깊은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달리는 점차 현실을 벗어나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태아였을 때를 기억한다"는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깊은 내면을 마주했는지를 짐작하게 하죠.
1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도피를 택했습니다. 그 너머를 상상하려는 흐름이 강해졌죠. 이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무의식이 주목받게 됩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억압된 감정과 욕망이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예술가들에게 무의식을 해석하는 새로운 렌즈가 되어 주었죠. 달리 역시 그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그는 프로이트를 ‘무의식의 아버지’라 부르며 경외심을 표했죠.
그 영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욕망의 수수께끼: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The Enigma of My Desire》입니다. 달리는 이 작품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그림 열점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 중 하나로, 무의식과 욕망에 대한 그의 탐구를 깊이 있게 보여주죠. 화면 중앙에는 구멍이 뚫린 기이한 형상이 등장합니다. 그 안에는 프랑스어로 ‘ma mère(나의 어머니)’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왼편에는 물고기, 메뚜기, 단검, 사자의 머리 등 상징적인 요소들이 등장하며, 달리가 아버지를 껴안고 있는 장면도 포착됩니다. 이 요소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달리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어머니에 대한 감정과 욕망을 드러냈죠.
Salvador Dalí, Persistence of Memory, 1931. ⓒdalipaintings.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 Persistence of Memory》 역시 그의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화한 결과물입니다. 녹아내리는 시계는 익숙한 시간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기억과 현실 사이를 흔들어 놓습니다. 이처럼 달리의 상상력은 기괴함을 넘어서 무의식을 정교하게 탐구한 하나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초현실을 살아간 남자, 브랜드가 된 예술가
Salvador Dalí, 1950. ⓒWeegee/Getty Images.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깊어지던 시기, 달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향합니다. 이곳에서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피카소, 호안 미로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죠. 달리는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라는 말로 자신의 위치를 선언했습니다. 초현실주의 안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낸 달리는 작품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연출의 달인이자 이야기꾼이었습니다. 무의식을 그리는 동시에 자신이라는 인물을 하나의 상징으로 구축했죠. 달리가 세상에 보인 기이한 모습은 단순한 괴짜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달리만의 세계를 전달하는 방식이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치였죠.
Salvador Dalí, The enigma of Hitler, 1939. ⓒsalvador-dali.org.
"나는 히틀러를 여자로 보는 꿈을 자주 꾼다. 흰색보다 더 하얗다고 상상했던 그의 살이 나를 기쁘게 했다… " - 살바도르 달리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활동하던 달리는 곧 그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합니다. 당시 초현실주의는 반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많은 예술가가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하고 있었죠. 하지만 달리는 공공연히 자본주의를 옹호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를 여자로 보는 꿈을 꾼다”고 말하는 등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죠. 이러한 발언은 도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달리는 반복적으로 히틀러에 대한 꿈을 꾸었고, 그 불안과 강박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히틀러의 수수께끼 The Enigma of Hitler》는 그런 심리를 반영한 대표작입니다. 황량한 해변 위, 흰 접시에 찢어진 히틀러의 사진 조각과 콩 몇 알이 놓여 있고 그 위로는 수화기가 부서진 전화기가 매달려 있습니다. 이 전화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상징합니다. 옆에 놓인 빈 조개껍데기와 박쥐는 창조와 죽음을 동시에 암시하죠. 달리는 이 작품을 통해 히틀러에 대한 모호한 매혹과 두려움을 드러내며 무의식의 세계를 가시화했습니다. 이런 달리의 히틀러에 대한 집착은 초현실주의 그룹 내에서 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그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되었죠.
Salvador Dalí Takes His Anteater for a Stroll in Paris, 1969. ⓒPatrice Habans.
달리는 꾸준히 자신만의 초현실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작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의 이미지로 정밀하게 구상했죠. 상징적인 콧수염 역시“가장 진지한 부분”이라 말하며, 그 모양까지 의미를 덧입혔습니다. 화려한 의상, 과장된 손짓, 무대처럼 연출된 장면들까지. 달리의 등장은 언제나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관심을 어떻게 끌고 활용할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달리의 돌발 행동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질문을 남겼습니다. 파리 중심가에서 줄에 묶은 개미핥기 두 마리를 데리고 거닐거나, 자신의 그림을 몸에 묶어 직접 끌고 다니는 식이었죠.
Dalí in a diving helmet, 1936.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그중에서도 유명한 일화는 1936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에서의 ‘잠수복 강연’입니다. 당시 달리는 무의식의 심해에서 연설하고 싶다며 잠수복을 입고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강연 중 산소 부족으로 실신 직전까지 가게 되며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렸죠. 덕분에 언론의 주목은 더욱 커졌고, 그의 이름은 또 한 번 대중의 뇌리에 박히게 됩니다.
Salvador Dalí with his pet ocelot, 1965. ⓒLibrary of Congress.
그 외에도 그는 야생 오셀롯을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니고, 롤스로이스에 콜리플라워 500kg을 싣고 파리를 질주하기도 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이에게는 “모든 것은 콜리플라워로 끝납니다”라는 말만 남겼죠. 황당하겠지만 ‘왜?’라는 질문을 유도하는 것이 달리의 전략이었습니다. 의문을 남긴 존재는 쉽게 잊히지 않으니까요.
달리는 늘 상식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한 방송에서는 자신을 작가, 운동선수, 만화가라고 소개하며 혼란을 유도했고, 오노 요코에게는 콧수염을 1만 달러에 팔겠다며 마른 풀잎을 넣은 상자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마저도 달리다운 장난으로 남았고요. 이 모든 기행은 달리가 세상을 상대로 펼친 거대한 연극이었습니다. 회화와 조각, 글쓰기와 방송 출연까지 넘나들며 ‘살바도르 달리’라는 인물을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죠. 늘 이야기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고, 그 중심이야말로 달리가 가장 사랑한 무대였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괴짜, 초현실적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한 천재
Salvador Dali viewing the camera through a magnifying glass at his home in Cadaques on the Spanish Costa Brava, 1955. ⓒCharles Hewitt/Getty Images.
달리의 예술은 갤러리나 화폭 안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무대, 패션, 광고, 제품 디자인까지 장르와 산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스스로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었죠. 특히 그의 예술은 패션과 자주 만났습니다. 코코 샤넬과의 인연도 그중 하나죠. 1930년대 후반, 샤넬은 프랑스 리비에라의 별장에 달리를 초대해 창작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이곳에서 달리는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연극과 무대 디자인에 관심을 넓혔습니다. 무대 의상, 주얼리,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던 샤넬의 감각은 달리에게도 강한 자극이 되었죠. 이후 달리는 발레 공연 Bacchanale의 의상 디자인에 참여하며 자신의 감각을 드러냈습니다. 샤넬 No.5의 병에서 영감을 받아 달리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향수 Essence of Dalí를 제작하기도 했죠.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패션’이라는 새로운 예술 언어를 열어주었습니다.
좌: The Friendship of Salvador Dalí and Coco Chanel: Salvador Dalí, Costume designs for the Bacchanale ballet, 1939. ⓒHorst P. Horts/Artsy. 우: The Friendship of Salvador Dalí and Coco Chanel: The Essence of Dalí. ⓒPhilippe Halsman/Magnum Photos.
The Friendship of Salvador Dalí and Coco Chanel: Salavdor Dalí, The Eye of Time, ⓒFundació Gala-Salvador Dalí.
샤넬과의 인연 외에도 달리는 엘사 스키아파렐리, 크리스찬 디올 등과 협업하며 ‘입을 수 있는 초현실주의’를 선보였습니다. 주얼리, 향수병, 의상 등 다양한 제품에 자신의 상징을 녹여내며 예술의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Elsa Schiaparelli, The Tears dress, 1938. ⓒVictoria & Albert Museum.
Salvador Dalí and Walt Disney by the beach in Spain, 1957. ⓒTheDali.org.
ⓒDisney.
달리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에도 손을 뻗었습니다. 1945년, 디즈니와 파티에서 시작된 인연은 단편 애니메이션 <Destino>로 이어졌습니다. 달리는 디즈니 스튜디오에 머무르며 8개월간 135장의 드로잉과 회화를 완성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재해석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 대한 두 예술가의 전혀 다른 시선입니다. 달리는 이를 “시간의 미로 속 삶의 본질을 다룬 철학적 비주얼”로 봤고, 디즈니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이야기”로 해석했죠.
Spellbound. 1945. Directed by Alfred Hitchcock. ⓒMoMA.
ⓒAlfred Hitchcock.
1945년, 달리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스펠바운드의 꿈 장면을 맡아 작업하게 됩니다. 정신분석을 주요 소재로 삼은 영화로, 주인공이 자신의 꿈을 통해 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었죠. 달리는 공중에 떠 있는 눈, 얼굴 없는 사람들, 기이한 카드 게임처럼 무의식을 상징하는 초현실적 이미지를 설계했습니다. 달리가 작업한 이러한 요소들은 기존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기 힘든 신선한 시도로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제작사의 우려로 인해 원래 20분 분량으로 계획되었던 장면은 결국 약 3분 정도만 영화에 사용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큰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희귀한 영화”라 평했고, 뉴요커는 “꼭 봐야 할 작품”이라 소개했죠. 아카데미상 6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이후 이 영화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구상한 장면 대부분이 편집된 데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죠.
ⓒLANVIN.
1968년, 프랑스에서 방영된 랑방 초콜릿 광고에서 달리는 카메라를 향해 “나는 랑방 초콜릿이야!”라고 외칩니다. 고전 음악과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초콜릿을 깨물고, 맛에 감탄한 나머지 눈동자가 돌아가고 콧수염은 시곗바늘처럼 튀어 오르죠. 유쾌하면서도 기이한 장면의 광고는 마치 한 편의 쇼를 연상시킵니다. 초현실주의가 광고 매체 속으로 스며든 순간이었죠.
좌: Chupa Chups logo Designed by Salvador Dali, 1969. ⓒlogodesignlove. / 우: Chupa Chups logo ⓒchupachups.com.
달리의 대표적인 작업 중 하나는 사탕 브랜드 ‘츄파춥스’의 로고 디자인입니다. 친구이자 츄파춥스 창업자인 엔리크 바르나트와 커피를 마시던 중, 그는 로고가 잘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르나트의 하소연을 듣게 됩니다. 달리는 즉석에서 냅킨 위에 노란 데이지꽃 모양의 로고를 스케치했죠. 이 로고는 지금까지도 브랜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달리는 활동 영역을 넓혀 다양한 브랜드 광고에 등장했습니다. 상업 활동조차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이죠. 영화에 단 1분 출연하고도 최소 1만 달러를 요구할 만큼, 그는 언제나 철저한 계산 아래 움직였습니다. 프랑스 언론은 달리의 이름을 비틀어 ‘Avida Dollars(달러에 굶주린 자)’라 부르기도 했지만, 돈과 사치에 대한 욕망은 오히려 달리로 하여금 더 많은 예술을 만들어내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브랜드와의 협업은 달리에게 또 다른 방식의 표현이자 새로운 장을 여는 작업이었습니다. 초콜릿 광고는 하나의 쇼처럼, 로고 디자인은 작품처럼 기억되었죠. 예술과 상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달리는 자신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해 나갔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기행, 자신을 예술로 상품화한 천재
Salvador Dali wearing an animal skull as a hat, 1950. ⓒHulton Archive/Getty Images.
살바도르 달리는 예술가이자 시대를 읽는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그림만으로는 자신의 상상력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죠. 그래서 화폭을 넘어 더 넓은 무대로 향했습니다. 예술과 이윤의 충돌을 고민하기보다는 그 접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며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수염 하나, 인터뷰 한 마디까지도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을 보이며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갔습니다. 달리에게 예술은 ‘보여주는 것’을 넘어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시대를 앞선 감각으로 사람들의 관점을 철저히 비틀고,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던 달리. 유쾌하면서도 통념을 깨는 그의 방식은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어쩌면 달리가 진짜로 그리고자 했던 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세상을 비틀어보는 상상력일까요, 아니면 그 비틀림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일까요?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에게 달리의 세계는 어떻게 다가왔나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면, 댓글로 살짝 나눠주셔도 좋아요. 당연했던 것들에 물음표 하나쯤 그려보는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 마칩니다.
ARTLETTER | artist
VOL.124 브랜드가 되어버린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
Dali on deck of S S Normandie docking in NYC, 1936. ⓒNYSocialMedia.
예술은 감각의 싸움이지만, 시대를 꿰뚫는 눈과 대중을 끌어당기는 전략이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중에서도 살바도르 달리는 이 두 감각을 가장 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었습니다. 달리는 자신의 외모와 언행,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모두 계산된 전략으로 활용했습니다. 콧수염 하나, 복장 하나까지도 자신을 상징하는 요소로 만들었죠. 달리는 늘 같은 스타일의 제복을 입고 언론 앞에서는 오만할 정도로 확신에 찬 태도를 보였습니다. 심지어 지하철역에서 개미핥기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며 시선을 끄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죠. 이렇듯 달리는 언론을 무대로, 대중을 관객 삼아 ‘살바도르 달리’라는 캐릭터를 연출했습니다.
달리는 누구보다 일찍 깨달았습니다. ‘이상하고 기묘한 것’이 곧 주목을 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걸요. 그리고 그 흐름을 타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래 남을 캐릭터를 구축했습니다. 그 결과, 달리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와 브랜드가 참고하는 마케팅의 아이콘이 되었죠.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달리는 어떤 인물일까요? 그리고 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브랜드로 만들었을까요? 오늘의 레터에서는 브랜드가 되어버린 예술가, 살바도르의 달리에 대해 들여다보겠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 세상이 열광하는 괴짜로
Salvador Dalí, 1939. ⓒCarl Van Vechten.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예술계의 이단아였습니다. 1904년, 그는 스페인 북동부의 해안 도시 피게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달리는 유치원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8세에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며 정식으로 예술 수업을 받게 되죠.
이쯤에서 달리의 삶이 순탄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지만, 그의 유년기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달리에게는 그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난 형이 있었습니다. 형을 잃어 상심한 부모님은 달리를 형의 환생으로 여기며 동일시했죠. 죽은 형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했던 그는 정체성 혼란, 강박, 편집증, 애정 결핍에 시달렸습니다. 여기에 어머니의 우울증까지 더해져 달리는 보호자에 가까운 역할을 해야 했죠. 불안정한 유년기는 달리의 내면 깊이 각인되어 일탈과 기행, 예술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죽은 형의 초상 Portrait de mon frère mort》입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형을 기리며 제작한 작품으로, 달리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보다 예술로 승화시켰음을 보여주죠. 그는 “비극적인 유년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퍼포먼스를 예술의 일부로 끌어올리곤 했습니다.
Salvador Dalí, Portrait de mon frère mort, 1939. ⓒThe Gala Dali Foundation.
달리는 괴짜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선천적인 재능과 함께 어릴 적부터 압도적인 드로잉 실력을 보였죠. 10대 시절에는 이미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켰습니다. 마드리드 미술학교 시절에는 “교수들이 내 그림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죠. 결국 달리는 퇴학당하지만, 그 오만함조차도 실력이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혼란과 천재성을 동시에 지녔던 달리는, 자기 내면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삶을 재구성해 나갔습니다.
이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무의식
Salvador Dalí, The Enigma of My Desire, 1929. ⓒdalipaintings.
미술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가족과의 관계도 순탄하지 않았던 불안한 유년기. 달리는 종종 꿈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곤 했습니다. 하지만 불안은 오히려 그를 더 깊은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달리는 점차 현실을 벗어나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태아였을 때를 기억한다"는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깊은 내면을 마주했는지를 짐작하게 하죠.
1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도피를 택했습니다. 그 너머를 상상하려는 흐름이 강해졌죠. 이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무의식이 주목받게 됩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억압된 감정과 욕망이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예술가들에게 무의식을 해석하는 새로운 렌즈가 되어 주었죠. 달리 역시 그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그는 프로이트를 ‘무의식의 아버지’라 부르며 경외심을 표했죠.
그 영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욕망의 수수께끼: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The Enigma of My Desire》입니다. 달리는 이 작품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그림 열점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 중 하나로, 무의식과 욕망에 대한 그의 탐구를 깊이 있게 보여주죠. 화면 중앙에는 구멍이 뚫린 기이한 형상이 등장합니다. 그 안에는 프랑스어로 ‘ma mère(나의 어머니)’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왼편에는 물고기, 메뚜기, 단검, 사자의 머리 등 상징적인 요소들이 등장하며, 달리가 아버지를 껴안고 있는 장면도 포착됩니다. 이 요소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달리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어머니에 대한 감정과 욕망을 드러냈죠.
Salvador Dalí, Persistence of Memory, 1931. ⓒdalipaintings.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 Persistence of Memory》 역시 그의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화한 결과물입니다. 녹아내리는 시계는 익숙한 시간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기억과 현실 사이를 흔들어 놓습니다. 이처럼 달리의 상상력은 기괴함을 넘어서 무의식을 정교하게 탐구한 하나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초현실을 살아간 남자, 브랜드가 된 예술가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깊어지던 시기, 달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향합니다. 이곳에서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피카소, 호안 미로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죠. 달리는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라는 말로 자신의 위치를 선언했습니다. 초현실주의 안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낸 달리는 작품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연출의 달인이자 이야기꾼이었습니다. 무의식을 그리는 동시에 자신이라는 인물을 하나의 상징으로 구축했죠. 달리가 세상에 보인 기이한 모습은 단순한 괴짜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달리만의 세계를 전달하는 방식이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치였죠.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활동하던 달리는 곧 그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합니다. 당시 초현실주의는 반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많은 예술가가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하고 있었죠. 하지만 달리는 공공연히 자본주의를 옹호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를 여자로 보는 꿈을 꾼다”고 말하는 등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죠. 이러한 발언은 도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달리는 반복적으로 히틀러에 대한 꿈을 꾸었고, 그 불안과 강박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히틀러의 수수께끼 The Enigma of Hitler》는 그런 심리를 반영한 대표작입니다. 황량한 해변 위, 흰 접시에 찢어진 히틀러의 사진 조각과 콩 몇 알이 놓여 있고 그 위로는 수화기가 부서진 전화기가 매달려 있습니다. 이 전화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상징합니다. 옆에 놓인 빈 조개껍데기와 박쥐는 창조와 죽음을 동시에 암시하죠. 달리는 이 작품을 통해 히틀러에 대한 모호한 매혹과 두려움을 드러내며 무의식의 세계를 가시화했습니다. 이런 달리의 히틀러에 대한 집착은 초현실주의 그룹 내에서 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그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되었죠.
Salvador Dalí Takes His Anteater for a Stroll in Paris, 1969. ⓒPatrice Habans.
달리는 꾸준히 자신만의 초현실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작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의 이미지로 정밀하게 구상했죠. 상징적인 콧수염 역시 “가장 진지한 부분”이라 말하며, 그 모양까지 의미를 덧입혔습니다. 화려한 의상, 과장된 손짓, 무대처럼 연출된 장면들까지. 달리의 등장은 언제나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관심을 어떻게 끌고 활용할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달리의 돌발 행동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질문을 남겼습니다. 파리 중심가에서 줄에 묶은 개미핥기 두 마리를 데리고 거닐거나, 자신의 그림을 몸에 묶어 직접 끌고 다니는 식이었죠.
Dalí in a diving helmet, 1936.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그중에서도 유명한 일화는 1936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에서의 ‘잠수복 강연’입니다. 당시 달리는 무의식의 심해에서 연설하고 싶다며 잠수복을 입고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강연 중 산소 부족으로 실신 직전까지 가게 되며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렸죠. 덕분에 언론의 주목은 더욱 커졌고, 그의 이름은 또 한 번 대중의 뇌리에 박히게 됩니다.
그 외에도 그는 야생 오셀롯을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니고, 롤스로이스에 콜리플라워 500kg을 싣고 파리를 질주하기도 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이에게는 “모든 것은 콜리플라워로 끝납니다”라는 말만 남겼죠. 황당하겠지만 ‘왜?’라는 질문을 유도하는 것이 달리의 전략이었습니다. 의문을 남긴 존재는 쉽게 잊히지 않으니까요.
달리는 늘 상식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한 방송에서는 자신을 작가, 운동선수, 만화가라고 소개하며 혼란을 유도했고, 오노 요코에게는 콧수염을 1만 달러에 팔겠다며 마른 풀잎을 넣은 상자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마저도 달리다운 장난으로 남았고요. 이 모든 기행은 달리가 세상을 상대로 펼친 거대한 연극이었습니다. 회화와 조각, 글쓰기와 방송 출연까지 넘나들며 ‘살바도르 달리’라는 인물을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죠. 늘 이야기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고, 그 중심이야말로 달리가 가장 사랑한 무대였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괴짜, 초현실적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한 천재
Salvador Dali viewing the camera through a magnifying glass at his home in Cadaques on the Spanish Costa Brava, 1955. ⓒCharles Hewitt/Getty Images.
달리의 예술은 갤러리나 화폭 안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무대, 패션, 광고, 제품 디자인까지 장르와 산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스스로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었죠. 특히 그의 예술은 패션과 자주 만났습니다. 코코 샤넬과의 인연도 그중 하나죠. 1930년대 후반, 샤넬은 프랑스 리비에라의 별장에 달리를 초대해 창작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이곳에서 달리는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연극과 무대 디자인에 관심을 넓혔습니다. 무대 의상, 주얼리,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던 샤넬의 감각은 달리에게도 강한 자극이 되었죠. 이후 달리는 발레 공연 Bacchanale의 의상 디자인에 참여하며 자신의 감각을 드러냈습니다. 샤넬 No.5의 병에서 영감을 받아 달리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향수 Essence of Dalí를 제작하기도 했죠.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패션’이라는 새로운 예술 언어를 열어주었습니다.
좌: The Friendship of Salvador Dalí and Coco Chanel: Salvador Dalí, Costume designs for the Bacchanale ballet, 1939. ⓒHorst P. Horts/Artsy.
우: The Friendship of Salvador Dalí and Coco Chanel: The Essence of Dalí. ⓒPhilippe Halsman/Magnum Photos.
샤넬과의 인연 외에도 달리는 엘사 스키아파렐리, 크리스찬 디올 등과 협업하며 ‘입을 수 있는 초현실주의’를 선보였습니다. 주얼리, 향수병, 의상 등 다양한 제품에 자신의 상징을 녹여내며 예술의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Elsa Schiaparelli, The Tears dress, 1938. ⓒVictoria & Albert Museum.
Salvador Dalí and Walt Disney by the beach in Spain, 1957. ⓒTheDali.org.
ⓒDisney.
달리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에도 손을 뻗었습니다. 1945년, 디즈니와 파티에서 시작된 인연은 단편 애니메이션 <Destino>로 이어졌습니다. 달리는 디즈니 스튜디오에 머무르며 8개월간 135장의 드로잉과 회화를 완성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재해석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 대한 두 예술가의 전혀 다른 시선입니다. 달리는 이를 “시간의 미로 속 삶의 본질을 다룬 철학적 비주얼”로 봤고, 디즈니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이야기”로 해석했죠.
Spellbound. 1945. Directed by Alfred Hitchcock. ⓒMoMA.
ⓒAlfred Hitchcock.
1945년, 달리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스펠바운드의 꿈 장면을 맡아 작업하게 됩니다. 정신분석을 주요 소재로 삼은 영화로, 주인공이 자신의 꿈을 통해 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었죠. 달리는 공중에 떠 있는 눈, 얼굴 없는 사람들, 기이한 카드 게임처럼 무의식을 상징하는 초현실적 이미지를 설계했습니다. 달리가 작업한 이러한 요소들은 기존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기 힘든 신선한 시도로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제작사의 우려로 인해 원래 20분 분량으로 계획되었던 장면은 결국 약 3분 정도만 영화에 사용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큰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희귀한 영화”라 평했고, 뉴요커는 “꼭 봐야 할 작품”이라 소개했죠. 아카데미상 6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이후 이 영화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구상한 장면 대부분이 편집된 데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죠.
ⓒLANVIN.
1968년, 프랑스에서 방영된 랑방 초콜릿 광고에서 달리는 카메라를 향해 “나는 랑방 초콜릿이야!”라고 외칩니다. 고전 음악과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초콜릿을 깨물고, 맛에 감탄한 나머지 눈동자가 돌아가고 콧수염은 시곗바늘처럼 튀어 오르죠. 유쾌하면서도 기이한 장면의 광고는 마치 한 편의 쇼를 연상시킵니다. 초현실주의가 광고 매체 속으로 스며든 순간이었죠.
좌: Chupa Chups logo Designed by Salvador Dali, 1969. ⓒlogodesignlove. / 우: Chupa Chups logo ⓒchupachups.com.
달리의 대표적인 작업 중 하나는 사탕 브랜드 ‘츄파춥스’의 로고 디자인입니다. 친구이자 츄파춥스 창업자인 엔리크 바르나트와 커피를 마시던 중, 그는 로고가 잘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르나트의 하소연을 듣게 됩니다. 달리는 즉석에서 냅킨 위에 노란 데이지꽃 모양의 로고를 스케치했죠. 이 로고는 지금까지도 브랜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달리는 활동 영역을 넓혀 다양한 브랜드 광고에 등장했습니다. 상업 활동조차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이죠. 영화에 단 1분 출연하고도 최소 1만 달러를 요구할 만큼, 그는 언제나 철저한 계산 아래 움직였습니다. 프랑스 언론은 달리의 이름을 비틀어 ‘Avida Dollars(달러에 굶주린 자)’라 부르기도 했지만, 돈과 사치에 대한 욕망은 오히려 달리로 하여금 더 많은 예술을 만들어내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브랜드와의 협업은 달리에게 또 다른 방식의 표현이자 새로운 장을 여는 작업이었습니다. 초콜릿 광고는 하나의 쇼처럼, 로고 디자인은 작품처럼 기억되었죠. 예술과 상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달리는 자신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해 나갔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기행, 자신을 예술로 상품화한 천재
Salvador Dali wearing an animal skull as a hat, 1950. ⓒHulton Archive/Getty Images.
살바도르 달리는 예술가이자 시대를 읽는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그림만으로는 자신의 상상력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죠. 그래서 화폭을 넘어 더 넓은 무대로 향했습니다. 예술과 이윤의 충돌을 고민하기보다는 그 접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며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수염 하나, 인터뷰 한 마디까지도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을 보이며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갔습니다. 달리에게 예술은 ‘보여주는 것’을 넘어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시대를 앞선 감각으로 사람들의 관점을 철저히 비틀고,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던 달리. 유쾌하면서도 통념을 깨는 그의 방식은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어쩌면 달리가 진짜로 그리고자 했던 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세상을 비틀어보는 상상력일까요, 아니면 그 비틀림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일까요?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에게 달리의 세계는 어떻게 다가왔나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면, 댓글로 살짝 나눠주셔도 좋아요. 당연했던 것들에 물음표 하나쯤 그려보는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 마칩니다.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달리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예술계의 이단아였습니다.
2. 달리는 유년기부터 죽은 형의 그림자로 살아가며 정체성 혼란과 결핍에 시달렸습니다.
3. 불안한 현실을 피해 달리는 무의식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4. 달리는 무의식을 표현하며 자기 자신을 상징화한 이야기꾼이었습니다.
5. 달리는 자본주의 옹호와 히틀러 관련 언행으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됐습니다.
6. 달리는 대중의 관심을 끄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7. 1936년, 달리는 ‘잠수복 강연’ 사건으로 충격과 주목을 동시에 끌어냈습니다.
8. 달리는 언제나 상식을 뒤엎는 방식으로 세상과 마주했습니다.
9. 달리는 무대·패션·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 발을 넓히며 자신을 브랜드화했습니다.
10. 예술과 전략으로 ‘살바도르 달리’라는 상징을 만들었습니다.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처: Philippe Hal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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