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23 낙서인가, 예술인가? 거리에서 피어난 바스키아의 예술 |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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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3 낙서인가, 예술인가? 거리에서 피어난 바스키아의 예술

Jean-Michel Basquiat ©Dritri Kasterine.

거리의 낙서를 미술관의 예술로 바꾼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장 미셸 바스키아죠. 삐뚤빼뚤한 선, 거친 글씨, 강렬한 원색. 얼핏 보면 난해한 그의 그림엔 도시의 삶, 인종 문제, 권력과 죽음, 그리고 그 자신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스키아의 작품은 자꾸만 눈길을 끕니다. 바스키아의 시작은 뉴욕 거리의 그래피티였습니다. 하지만 낙서를 하던 청년은 곧 미술계의 중심으로 뛰어들었죠. 바스키아의 캔버스 작품은 1,200억 원에 낙찰되며 현대미술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검은 피카소’라 불리며 키스 해링과 함께 거리 예술의 경계를 넓히며 그래피티를 예술로 만들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스키아의 작품을 보고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스키아는 어떻게 예술과 낙서의 경계를 허물었을까요? 그리고 왜 그의 작품은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까요? 오늘의 레터에서는 바스키아의 여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병상에서 거리까지, 바스키아를 만든 시간


Jean-Michel Basquiat ©Marion Busch.


장 미셸 바스키아는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이티 출신의 회계사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와 푸에르토리코계 패션 디자이너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 사이에서 자란 그는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하지만 바스키아의 관심은 숫자가 아니라 색과 선에 있었습니다. 네 살 때 이미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그는 책을 탐독하고 그림을 그리며 세상을 관찰하는 데 몰두했죠. 바스키아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뉴욕 곳곳의 미술관에 그를 데려갔습니다. 바스키아는 메트로폴리탄, 모마, 브루클린 미술관을 오가며 감각을 키웠죠. 한 번은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 Guernica>를 보고 충격을 받아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Jean-Michel Basquiat, In This Case, 1983. ©Christie's.

1968년, 여덟 살의 바스키아는 교통사고로 팔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입원 중이던 그에게 어머니는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이라는 책을 선물했고, 바스키아는 이를 탐독하며 인체 구조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 드로잉에 영향을 받아 독학으로 연구를 이어갔죠. 이 경험은 훗날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에 중요한 모티프가 됩니다.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해부학적 요소로 자리 잡았죠. 이러한 영향은 바스키아의 대표적인 해골 연작 중 하나인 In This Case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강렬한 색채와 해골 형상으로 죽음과 사회적 불안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오랫동안 발렌티노 공동 설립자 잔카를로 지암메티의 컬렉션에 있었습니다. 이후 202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상가(5천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9,310만 달러에 낙찰되며 큰 화제를 모았죠.


Jean-Michel Basquiat ©Photobycollis.

하지만 바스키아의 가정환경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의 이혼 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어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점점 멀어졌죠. 어린 시절 겪은 인종차별과 가족의 붕괴는 바스키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는 그림을 통해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반항심은 더욱 커졌고, 결국 가출과 노숙을 반복하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하며 집에서도 쫓겨났죠.


Jean-Michel Basquiat in the film ‘Downtown 81’ (1980–81/2000) ©MARKA/Alamy.

바스키아는 친구들과 브루클린을 떠돌며 티셔츠와 직접 만든 우표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뉴욕 거리를 휩쓸던 힙합, 브레이크댄스, 펑크 문화에 영향을 받게 되는데요. 그 안에서 바스키아는 자신만의 언어를 찾았습니다. 허름한 벽과 지하철에 낙서를 남기던 10대들의 반항적인 그래피티였죠. 그는 그 위에 자신만의 색을 덧입히며 낙서를 예술로 바꾸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스프레이 캔 하나로 뉴욕을 뒤흔든 소년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SAMO© Tarp), 1979. ©Capsule Auctions.


거리에서 예술을 배워가던 바스키아는 대안 고등학교 ‘City As School’에 진학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게 되죠. 두 사람은 예술적 관심사를 공유하며 빠르게 친해졌습니다. 히스패닉 계열의 뿌리, 비슷한 유머 감각, 외향적인 성격까지. 그들은 많은 부분에서 통했죠. 특히 ‘언어’에 대한 관심이 깊어 함께 학교 신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77년, 바스키아와 디아즈는 신문에 ‘SAMO’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 속 SAMO는 현대적이고 죄책감 없는 이상적인 종교로 묘사되어 있었죠. 이후 그들은 ‘SAMO를 믿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허구의 전단지를 만들어 거리 곳곳에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디아즈는 훗날 “그때 우리에겐 그냥 재미있는 장난이었다”고 회상했지만, 이 장난은 점점 커지기 시작합니다.

SAMO는 ‘Same Old Shit’의 약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스키아와 디아즈는 이를 낙서에서 메시지로 확장했죠. 스프레이, 마커, 오일 크레용을 들고 뉴욕 소호의 벽을 캔버스 삼았습니다. 바스키아는 ‘SAMO’ 뒤에 저작권 기호(©)를 붙이며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부심과 세상 속 흑인들에게 보내는 존경심을 드러냈죠. SAMO 시절부터 등장한 저작권 기호와 함께, 왕관, 공룡 같은 상징들은 그의 작품 곳곳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불의에 맞서는 영웅의 이미지이자, 바스키아 스스로를 투영한 또 다른 자화상이었죠.


“세이모(SAMO)는 조숙하고 세상 물정에 밝은 십대 정신의 재치있는 말들을 보여주었는데, 아주 이른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사회적 환경- 백인들이 주를 이루는 예술 세계와 기업 상품 구조를 두려움 없이 병치하고 있다.” 

- 프랭클린 시르만스(Franklin Sirmans), '암호 속: 바스키아와 힙합 문화(In the Cipher: Basquiat and HipHop Culture)' 中


©SAMO Archive.


초기 SAMO 그래피티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습니다. ‘기도’, ‘예수의 구원’ 같은 문구가 곳곳에 등장했죠. 대표적인 예로 “SAMOⓒ as an alternative to GOD(신의 대안으로서의 SAMOⓒ)” 같은 문장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제는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사회에 대한 불만, 개인적인 농담, 도시의 무질서 속 단상 등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그래피티로 남기기 시작합니다.


©SAMO Archive.


뉴욕 거리의 낙서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났습니다. SAMO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늘어났죠. 특히 SAMO는 기존 그래피티와 달랐기 때문에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당시 그래피티는 보통 작가의 닉네임, 번호, 출신 지역 같은 단순한 정보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SAMO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 풍자를 담았죠. 직관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문구는 많은 이들을 매료시켰습니다.


The Village Voice article, ©Al Diaz.


1978년,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의 필립 파블릭이 "SAMOⓒ Graffiti: BOOSH-WAH or CIA?"(SAMOⓒ 그래피티: 헛소리인가 CIA인가?)라는 기사를 내면서 익명으로 활동하던 그들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점점 커지는 관심 속에서 두 사람의 방향은 엇갈리기 시작했죠. 바스키아는 더 널리 알려지길 원했습니다. 반면 디아즈는 익명의 거리 예술가로 남고 싶어 했죠.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집중했던 바스키아와, ‘그림’ 자체에 집중했던 디아즈는 결국 갈라서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뉴욕 곳곳에 'SAMO© is dead'라는 문구가 등장하며 그들의 결별을 공식적으로 알렸습니다. 훗날 디아즈는 당시를 돌아보며 “그 무렵 나는 그래피티보다 음악에 더 빠져 있었고, 바스키아를 막을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죠.


©artwort.


미술관을 점령한 거리의 예술가


SAMO© 활동을 마친 바스키아는 뉴욕 언더그라운드 아트 신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머드 클럽(Mudd Club), 클럽 57(Club 57) 같은 문화 공간에서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퍼포먼스, 회화, 음악 등 여러 방식을 실험했죠. 1980년 《타임스 스퀘어 쇼(The Times Square Show)》에 참여하면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듬해 《아트포럼(Artforum)》 매거진에 큐레이터 레네 리카르드(René Ricard)의 「The Radiant Child(빛나는 아이)」라는 글에 실리게 되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바스키아는 거리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캔버스 작업을 시작합니다.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Skull), 1981.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이 작품은 바스키아 초기작 중 하나로 거친 붓 터치와 강렬한 색감이 특징입니다. 단순한 낙서처럼 보이지만 몇 달간 공들여 완성한 작품이죠. 두개골 형상의 얼굴은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암시합니다. 노출된 이빨과 턱뼈는 해골을 연상시키지만, 남아 있는 눈과 머리카락은 생명력을 품고 있습니다. 강렬한 색채 대비로 얼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은 바스키아 특유의 표현 기법인데요. 이 작품은 바스키아가 뉴욕 미술 시장을 탐색하며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와 아이티 이민자 출신이라는 그의 정체성과 뉴욕 거리의 풍경, 나이트클럽 문화에서 형성된 감각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죠.


Jean-Michel Basquiat, New York, New York, 1981. ⓒJean-Michel Basquiat Foundation.

바스키아는 문자와 드로잉을 결합하는 독창적인 작업 방식으로도 주목받았습니다. 작품 New York, New York에서는 아크릴,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글자를 쓰고, 지우고, 덧칠하며 뉴욕의 풍경과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죠. 이러한 기법은 미국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의 컷업(Cut-up) 기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듯, 바스키아도 단어와 이미지를 뒤섞으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죠.


"나는 더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단어들에 선을 그어 지워버린다."
- 장 미셸 바스키아


ⓒMetrograph.

영화 <Downtown '81>은 1981년, 장 미셸 바스키아가 뉴욕의 예술계에서 떠오르는 스타가 되기 직전의 시점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는 아직 무명인 바스키아가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바스키아는 갤러리 세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 전, 스트리트 아트와 힙합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예술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이 영화는 바스키아가 자신의 예술을 통해 세상,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예술계와의 연결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예술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기 전, 그가 겪었던 중요한 순간들을 진지하게 담아내고 있죠.


Keith Haring and Jean-Michel Basquiat at the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1987. ⓒGeorge Hirose/NGV.


당시 바스키아가 자주 찾던 머드 클럽은 기존 예술 문화에 저항하는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장이었습니다. 키스 해링, 케니 샤프, 짐 자무쉬 같은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바스키아의 활동 반경도 넓어졌죠. 이곳에서 머드 클럽의 주인이자 영화 제작자, 큐레이터인 디에고 코르테즈를 만나게 된 바스키아는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코르테즈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코르테즈는 바스키아의 작품을 대량으로 구입하며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바스키아는 다양한 기회를 맞이하게 되죠. Blondie의 뮤직비디오에 DJ로 출연하고, 밴드 ‘Gray’를 결성해 공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뉴욕 아트 신에서 유색인종 예술가들이 소수라는 현실을 절실히 인식한 바스키아는 1970년대 후반에는 브롱크스와 할렘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업타운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BlondieMusicOfficial.

코르테즈는 머드 클럽에서 교류하던 100명의 아티스트를 모아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New York/New Wave》라는 단체전으로 뉴욕 롱아일랜드 시티에 위치한 현대 미술관 MoMA PS1에서 개최됐죠. 이 전시는 바스키아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열어준 기회가 됩니다. 그의 작품은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소호(SoHo)의 유명 갤러리들이 앞다투어 전시를 제안했죠. 이후 바스키아는 뉴욕을 넘어 국제 무대로 향합니다. 198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 VII에 최연소 작가로 초청되며 세계적인 명성을 확고히 했죠.


Jean-Michel Basquiat, Boy and Dog in a Johnnypump, 1982. ⓒJean-Michel Basquiat Foundation.


Boy and Dog in a Johnnypump는 바스키아가 전성기에 접어들며 제작한 작품입니다. 바스키아는 스트리트 아트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점점 더 정교하고 강렬한 표현 방식을 확립해 나갔죠. 작품 속 ‘Johnnypump’는 뉴욕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화전으로 바스키아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브루클린과 할렘의 여름 풍경을 반영합니다. 붉은색, 오렌지, 노란색이 뒤섞이며 뜨거운 여름날의 열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물보라 속에서 뛰노는 소년과 개는 원시적인 자유와 에너지를 상징하죠. 거친 붓질과 강렬한 색감이 만들어낸 이 작품은 뉴욕 거리의 역동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동경의 대상에서 친구로, 워홀과의 만남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outside Mary Boone Gallery, New York, May 3, 1984. ⓒAndy Warhol Foundation.

바스키아는 이미 미술계의 스타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건 ‘팝아트의 교황’이라 불린 앤디 워홀과의 만남 덕분이었죠. 워홀은 회화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다양한 시각 예술을 넘나들며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79년 뉴욕의 밤거리였습니다. 예술가 친구들과 어울리던 바스키아는 W.P.A. 식당 앞에서 워홀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따라 들어갔죠. 당시 큐레이터 헨리 겔트잘러와 식사 중이던 워홀에게 바스키아는 낙서가 담긴 엽서를 건넸습니다. 헨리는 “너무 어리다”며 거절했지만, 워홀은 흥미를 보이며 “잠깐만, 내가 살게.”라고 말하며 엽서를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만남이 바로 인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워홀은 바스키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죠. 두 사람이 가까워진 건 1982년, 화랑(미술 상인) 브루노 비쇼프베르거의 소개 이후였습니다.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가 바스키아를 데려왔다. 그리니치 빌리지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SAMO(세이모)'라는 이름을 쓰는 그 아이다.
나는 그에게 10달러를 쥐여줬고,그가 그림을 그린 티셔츠를 세렌디피티에서 팔아볼 수 있게 주선해 준 적도 있다.
그는 나를 귀찮게 하는 그런 유형의 아이였다.
- 1982년 10월 4일, 앤디워홀의 다이어리 中


Jean-Michel Basquiat, Dos Cabezas, 1982. ©Christie's.

1982년, 바스키아의 개인전을 연 비쇼프베르거는 같은 해 10월에 바스키아가 우상처럼 여겼던 워홀과의 점심 자리를 주선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단순한 인사에서 끝나지 않았죠. 바스키아는 점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지 두 시간 만에 워홀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들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아직 물감도 마르지 않은 상태였죠. 그 작품이 바로 Dos Cabezas입니다. 스페인어로 ‘두 개의 머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이 그림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첫 협업 작품이 됩니다.


Andy Warhol, Self-Portrait with Jean-Michel Basquiat, 4 October 1982. Bischofberger Collection, Menedorf-Zurich, Switzerland. ©Paris ADAGP License.


이후 바스키아와 워홀은 깊은 우정을 나눴습니다. 함께 작업하고 여행하며,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죠. 워홀은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자신의 명성과 마케팅 감각을 활용해 바스키아의 작품 가치를 끌어올렸고, 그의 그림은 순식간에 수만 달러에 팔리는 인기 작품이 되었죠. 컬렉터들은 미완성된 작품까지 앞다투어 구매할 정도로 열광했습니다.


Jean-Michel Basquiat, Crown, 1983. ⓒ개인 소장품.


화려한 성공 속에서도 바스키아는 흑인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왕관은 흑인의 문화적 성취를 기념하며 미술계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존경하는 흑인 인물들에게 헌정되기도 했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씌우며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의미를 담았죠. 즉 흑인 문화의 강인함과 예술적 업적을 강조하며 그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바스키아가 찾아왔다. (중략) 담배 한 갑을 사고 싶어서 자기 그림을 75센트에 팔았는데
일주일 뒤에 그의 갤러리에서 전화가 와서는 똑같은 그림을 자기네는 1,000달러에 샀다고 말했다.
바스키아는 그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건 웃기는 일이다.
그는 자기 그림을 2달러에 살 사람이 혹시 있나 찾아보고 있었다.
요즘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15,000달러에 팔리고 있다.
정작 그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작품을 2달러에 사 줄지 궁금해한다.

- 1983년 9월 13일, 앤디 워홀의 다이어리 中


성공의 정점에서 시작된 균열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Untitled (Two Dogs), 1984. ⓒartnet.

바스키아의 예술은 미술계와 대중 모두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앤디 워홀과의 협업으로 더욱 주목받았고, 두 사람은 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함께 만들어냈죠. 특히 1984년 공동 작업한 Untitled (Two Dogs)는 워홀의 선명한 색감과 바스키아의 거친 붓질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대표작입니다. 워홀이 대중적인 이미지를 그리면 바스키아가 그 위에 그래피티처럼 덧칠하며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냈죠. 주로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워홀이 오랜만에 붓을 들고 회화적 표현을 되살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좌: Michael Halsband, Andy Warhol and Jean-Michel Basquiat, 1985.
우: Andy Warhol, Warhol / Basquiat Paintings, exhibition poster for their joint show at the Tony Shafrazi Gallery, signed by Warhol, 1985.


하지만 성공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스키아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명해졌고 그 명성은 점점 그를 짓눌렀죠.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했다.” “둘은 연인 관계였다.” 같은 소문이 돌았고, 미술계 일부는 그를 백인 예술 시장에 소비되는 흑인 천재로만 바라봤습니다. 시기와 조롱이 이어짐에 따라 바스키아는 점점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죠.

1985년, 바스키아와 워홀은 공동 전시를 열며 복싱 글러브를 낀 채 촬영한 사진으로 홍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전시는 혹평을 받으며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바스키아가 워홀의 후광 덕에 성공했다고 폄하했죠. 뉴욕 타임스의 비비언 레이너는 “워홀의 또 다른 조작처럼 보인다.”며 “바스키아는 지나치게 순순히 협력하는 상대를 만났다.”고 혹평했습니다. 전시된 16점의 작품을 언급하며 “워홀, 16라운드에서 TKO.”라는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했죠. 이 전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Jean-Michel Basquiat, Riding with Death, 1988. ⓒsingulart.


1987년, 워홀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바스키아는 깊은 충격에 빠집니다. 가장 가까운 조력자이자 친구였던 워홀의 부재는 그의 삶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었죠. 이후 바스키아의 작품 세계는 한층 어두워지며 감정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립이 깊어지면서 약물 의존도 악화되었죠. 결국 1988년,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바스키아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Riding with Death는 그가 남긴 가장 상징적인 그림입니다. 화면에는 해골을 탄 인물과 거친 질감의 갈색 들판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인물이 해골을 지배하는 듯하지만 해골의 단단한 자세는 오히려 라이더를 통제하거나 어디론가 끌고 가는 듯한 인상을 주죠. 흰 해골과 검은 인물의 대비는 식민주의에 의해 억압된 아프리카 사회와 1980년대 미국의 인종 차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전의 거칠고 즉흥적인 붓질과 달리, 정돈된 구성을 보이며 바스키아의 내면에 자리한 깊은 불안을 보여주죠.


거리의 아이콘에서 현대미술의 전설로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Boxer), 1982. ©Christie's.

바스키아의 작품은 곧 그의 삶이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가 고스란히 스며 있죠. 그는 권투 챔피언 조 루이스 같은 흑인 문화의 아이콘들에게 자주 영감을 받았습니다. Untitled (Boxer)는 승리의 포즈를 취한 복서를 그린 작품이지만 치켜든 주먹과 해골을 닮은 얼굴은 승리 이상의 의미를 암시합니다. 인종 차별과 사회적 투쟁 속에서 영웅이자 희생자로 존재해야 했던 흑인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1982. ©Christie's.


이처럼 바스키아는 짧지만 강렬한 생애 동안 예술을 통해 인종, 권력, 정체성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현대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죠. 2017년, 그의 작품 Untitled는 소더비 경매에서 1억 1,050만 달러(약 1,200억 원)에 낙찰되며, 당시 미국 작가의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거리 예술을 현대미술로 확장시키고, 미술계의 편견과 싸우며 끝내 전설이 된 작가. 바스키아는 단 10년 남짓한 활동 기간 동안 누구보다 강렬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흑인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거리의 언어를 예술로 승화시키며 시대를 초월한 의미를 만들어냈죠. 그의 작품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새로운 시선을 열어줍니다. 어쩌면 바스키아는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캔버스 위에 휘갈긴 단어들, 거칠게 쌓아 올린 선과 색채 속 메시지는 점점 더 선명해지며 우리가 그 질문 앞에서 무엇을 답할지 고민하게 만들죠. 바스키아의 작품을 돌아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가 던진 메시지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감상평을 남겨주세요. 그럼, 오늘의 레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장 미셸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2. 바스키아는 8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해부학 책을 접하며 인체 구조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3. 같은 해 바스키아는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정신질환으로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림으로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했죠.

4. 거리에서 예술을 배운 바스키아는 ‘City As School’에 진학해 알 디아즈를 만나 ‘SAMO’라는 크루를 결성했습니다.

5. SAMO는 사회 비판과 개인적 메시지를 그래피티로 표현하며 주목받았지만, 유명세에 대한 견해 차이로 해체되었습니다.

6. 이후 바스키아는 뉴욕 언더그라운드 아트 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다양한 예술 실험을 했습니다.

7. 바스키아는 《New York/New Wave》 전시를 통해 본격적인 미술계 데뷔를 하며 유명 갤러리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8. 바스키아는 미술계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후 앤디 워홀과의 만남으로 전설적인 아티스트로 자리 잡게 되었죠.

9. 바스키아는 워홀과의 협업으로 주목받았지만, 1985년 공동 전시의 혹평으로 두 사람은 멀어졌습니다.

10. 1987년 워홀의 사망 이후 바스키아는 깊은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약물 의존이 심해지며 1988년 2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처: Guggenheim Bilb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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