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TTER | Art
VOL.118 뮤즈들의 희생은 필연이었을까? 여인을 집어삼킨 거장,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 ©Herbert List/Magnum photos.
오늘의 레터에서는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와 그의 작품 세계를 뒤흔든 여인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누구나 한 번쯤 접해봤을 텐데요, 그의 작품 뒤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피카소는 평생 수많은 여성을 만났고, 사랑이 깊어질 때마다 화풍도 변했죠. 새로운 연인을 맞이할 때마다 예술적 전환점을 맞이했던 그는 사랑과 예술을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뮤즈들에게 피카소의 사랑은 축복이기만 했을까요? 피카소의 삶을 스쳐 간 여성은 1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7명의 여인은 그의 예술과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하지만 그 관계의 끝은 모두 같지 않았습니다. 영감을 준 뮤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희생된 이들도 있었죠.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 뒤에서 그를 사랑했던 여성들은 그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피카소의 예술과 그 이면을 전해드립니다.

피카소의 첫 번째 뮤즈, 그러나 갇혀 있던 여인 –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

Pablo Picasso, <솔레르씨의 가족 La famille Soler>, 1903. ©Musée des Beaux Arts.
1904년, 가난하고 외로웠던 피카소는 파리에서 그의 첫 번째 뮤즈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납니다. 어린 시절 불행한 결혼을 피해 파리로 도망친 올리비에는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며 자유를 꿈꾸던 여성이었죠. 붉은 머리와 균형 잡힌 몸매, 쾌활한 성격을 지닌 그녀는 피카소를 단숨에 매료시켰습니다. 올리비에는 후일 회고록에서 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를 모른다면 피카소는 그리 특별나게 유혹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수상쩍게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집중이 되긴 했다. 여러분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에게서 감지하는 이러한 열정, 내면의 불꽃은 그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석처럼 작용했다. 그리고 나를 알고 싶어 하자, 나 역시 그를 알고 싶어졌다.”
올리비에와 사랑에 빠진 피카소는 우울하고 어두운 ‘청색 시대’를 마무리하고 따뜻한 색감이 돋보이는 ‘장미 시대’로 접어듭니다. 그녀는 피카소의 입체주의 실험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대표작인 <아비뇽의 처녀들>과 입체주의 조각 <여인의 상반신>의 모델이기도 했죠.

Pablo Picasso,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MoMA.
하지만 열정적인 사랑은 점점 집착과 갈등으로 변했습니다. 피카소는 올리비에를 강하게 소유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외출을 제한하며 점점 고립시켰죠. 올리비에 역시 피카소에게 충실하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1911년, 피카소의 두 번째 뮤즈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9년간의 동거는 막을 내리게 되었죠.

사랑인가, 탈출구인가? 올리비에가 남긴 두 번째 뮤즈 – 에바 구엘(Eva Gouel)
피카소의 집착은 점차 극단적으로 변했습니다. 올리비에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급기야 그녀를 집에 가두기까지 했죠. 지쳐버린 올리비에는 자신을 풀어줄 사람을 찾아 피카소에게 한 여자를 소개해 줍니다. 그녀가 바로 폴란드 출신 입체파 화가 루이 마르퀴스의 의붓딸, 에바 구엘이었어요. 그렇게 에바는 피카소의 두 번째 뮤즈가 됩니다.

피카소가 찍은 에바 구엘(Eva Gouel), 1912. Photo by Pablo Picasso.
올리비에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에바는 가정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다. 피카소를 조용히 돌봐주며 그의 삶에 안정을 더해줬죠. 덕분에 피카소는 작품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그의 입체주의 화풍도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좌: Pablo Picasso, <사랑하는 에바 J’aime Eva>, 1912. ©Musée Picasso. / 우: Pablo Picasso, <마 졸리 Ma Jolie>, 1911-1912. ©MoMA.
1912년에서 1914년 사이, 에바는 피카소의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중요한 모델이 되었어요. 그는 <사랑하는 에바>라는 작품에서 그녀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고, <마 졸리>에서는 그녀에 대한 애정을 그림 속에 담아냈죠. 하지만 피카소의 작품 속에서 에바는 직접적으로 그려지기보다 기타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로 상징되곤 했습니다.

피카소의 242 Boulevard Raspail에 있는 스튜디오, 1912. 출처: MoMA.
하지만 에바의 몸은 매우 허약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피카소와 함께 아비뇽에 머물던 그녀는 결국 병을 이기지 못했고, 1915년 12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겨우 서른의 나이였습니다. 에바는 피카소의 예술 세계에 깊은 울림을 남긴 뮤즈로 그의 작품 속에 영원히 새겨지게 됩니다.

세 번째 뮤즈이자 첫 결혼을 올린 여인 –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

피카소는 에바와 사별 후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든 파리의 카페 드 라 로통드(Café de la Rotonde)에 나와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왼쪽부터 화가 모딜리아니(Modigliani), 피카소(Picasso), 시인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 1916. Photo by 장 콕토(Jean Cocteau).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파리를 떠난 피카소는 1917년, 장 콕토와 함께 이탈리아 로마로 향합니다. 발레 공연 《퍼레이드》의 무대 장식을 맡게 된 그는 그곳에서 러시아 귀족 출신의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를 만나게 되죠.

피카소와 올가 코클로바(Picasso with Olga Hohlova in front of a poster of the ballet ‘Parade’), 1917. ©Pablo Ruiz Picasso net.
올가는 기품 있는 아름다움과 우아한 자태를 지닌 무용수였습니다. 피카소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열렬히 구애를 시작했죠. 하지만 올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결국 결혼을 조건으로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1918년, 37세의 피카소는 첫 아내가 된 올가와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죠.

Pablo Picasso, <안락의자에 앉은 올가의 초상 Portrait of Olga in an Armchair>, 191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올가와의 결혼은 피카소의 예술 세계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에서 벗어나 고전주의 화풍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녀는 그의 작품 속에서 중요한 모델이 되었죠. 우아한 몸선과 선명한 얼굴 윤곽을 지닌 올가는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품위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파리 라 보에티 거리에 있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며 상류층의 삶을 누렸어요. 피카소는 점차 부유한 생활에 익숙해졌고, 올가는 살롱을 운영하며 귀족적인 문화를 즐겼죠.

Pablo Picasso, <하레퀸으로 분장한 폴 Paul as harlequin>, 1924. ©Musée Picasso.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21년, 첫아들 파울로가 태어났지만 피카소는 여전히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의 기질로 인해 점점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는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 은밀한 관계를 맺었고, 이를 알게 된 올가는 큰 충격을 받아 아들과 함께 남프랑스로 떠나 별거를 시작했습니다. 올가는 이혼을 요구했지만, 피카소는 재산을 나누기 싫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죠. 시간이 흐르며 올가는 피카소의 혼외 자식까지 알게 되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그의 아내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알코올에 의존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그녀는 1955년, 암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피카소의 법적 아내로 남아 있게 되었죠.

천재의 뮤즈이자 희생자, 피카소 최고가 작품의 주인공 – 마리 테레즈 발테르(Marie-Thérèse Walter)
1927년, 마흔다섯의 피카소는 파리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17세의 금발 소녀 마리 테레즈 발테르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건강한 체격과 싱그러운 매력에 첫눈에 반한 그는 서점으로 데려가 자신이 등장하는 책을 보여주며 다가갔죠. 6개월간의 구애 끝에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지만, 당시 피카소는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 결혼한 유부남이었어요. 재산 문제로 이혼하지 않은 채 10년 동안 마리 테레즈와 은밀한 관계를 이어갔죠.

13세의 마레 테레즈 발테르, 1922. ©딸 마야 피카소.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이전 연인들과는 달랐어요. 금발의 젊은 여성이었던 그녀는 피카소에게 새로운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으며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이 자리 잡았죠. 피카소의 절친이자 사진작가 브라사이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피카소는 그녀의 금발, 빛나는 얼굴색, 조각 같은 몸매를 사랑했다. 그날 이후 그의 그림은 물결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 작품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신고전주의를 지나 초현실주의적 스타일을 실험하며 그녀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탐구했죠. 1931년, 피카소는 부아젤루에 성을 사들여 그녀와 함께 지내며 점점 더 그녀를 작품 속에 선명히 그려 넣기 시작했습니다.


좌: Pablo Picasso, <꿈 Le Rêve>, 1932. ©Tate Modern. / 우: Pablo Picasso, <누드, 초록 잎과 가슴 Nude, Green Leaves and Bust>, 1932. ©Christie’s.
1932년, 마리 테레즈가 피카소의 딸 마야를 임신했을 때 피카소는 <꿈>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피카소 작품 중 가장 관능적이고 서정적인 걸작으로, 이후 1억 5,500만 달러(약 1,720억 원)에 낙찰되며 그의 최고가 작품이 되었는데요. 빨간 안락의자에 앉아 깊이 잠든 그림 속 마리 테레즈의 모습은 부드러운 곡선과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육감적이면서도 꿈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죠. 같은 해 발표된 <누드, 초록 잎과 가슴> 역시 마리 테레즈를 향한 피카소의 집착과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좌: 마리 테레즈 발터와 딸 마야, ©Granger NYC/Rue des Archives. / 우: Pablo Picasso, <인형을 든 마야 Maya With Doll>, 1938. ©Pablo Ruiz Picasso net.
1935년,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두 번째 자녀 딸 마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1937년, 피카소의 새로운 연인 도라 마르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마리 테레즈는 점점 그의 삶에서 밀려났고, 둘의 사랑은 끝을 맞이했죠. 하지만 그녀는 평생 피카소를 잊지 못했어요. 17세 소녀 시절부터 그의 연인이었던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했죠. 그리고 1977년,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뒤, "피카소 곁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리 테레즈의 순수한 사랑과 피카소의 방탕한 삶이 맞물리며, 두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오네요.

'우는 여인’이 된 현실, 게르니카의 목격자 – 도라 마르(Dora Maar)
딸 마야가 태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1936년, 55세의 피카소는 시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26살 연하의 유고슬라비아 출신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를 만납니다. 이전 연인 마리 테레즈가 수줍고 순종적인 성향이었다면, 도라는 지적이면서도 강렬한 개성을 지닌 여성이었죠. 도라는 피카소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두 사람은 예술과 정치∙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빠르게 가까워집니다. 당시 피카소는 아내 올가와는 별거 중, 마리 테레즈와는 동거 중이었지만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도라와의 새 사랑을 시작했죠. 그렇게 도라는 피카소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맞이하게 됩니다.

<피카소와 도라 마르 Pablo Picasso & Dora Maar>, 1937. Photo by Man Ray.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나치의 폭격으로 ‘게르니카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접한 피카소는 분노와 절망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죠. 두 달 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가로 8m에 달하는 초대형 유화 <게르니카>를 공개하며 세상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피카소만의 강력한 선언이었죠.

Pablo Picasso, <게르니카 Guernica>, 1937. ©Museo Reina Sofia.

게르니카 작업을 하는 피카소, ©pablopicasso.org.
도라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며 사진으로 기록했어요. 그녀가 남긴 사진 덕분에 피카소의 창작 과정이 후대에 남겨졌고, <게르니카>는 예술 작품을 넘어 역사적 증거가 되었죠. 또한, 도라의 사진 속 강렬한 흑백 대비가 피카소의 작품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Pablo Picasso, <우는 여인 Femme en pleurs>, 1937. ©Tate Modern.
피카소는 도라를 선택하며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도라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피카소의 냉대도 시작되었죠. 피카소는 그녀의 감정을 거침없이 소모했고, 그녀가 눈물을 보이면 오히려 흥미를 느꼈습니다. 도라가 절망에 빠져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도 위로는커녕 그녀의 고통을 담은 작품 <우는 여자>를 완성했죠. 정면을 응시하는 눈과 옆을 향한 입, 일그러진 얼굴은 도라의 비탄을 날것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10년 가까이 연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피카소는 또 다른 젊은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며 도라를 밀어냈어요. 이별 후 도라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지만 다시 예술 활동을 재개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세상은 그녀를 <우는 여자>로 기억하지만, 도라는 피카소의 예술에 깊은 흔적을 남긴 예술가이자 사진가였습니다. 누구보다 강렬하게 사랑했고, 누구보다 깊이 상처받았지만, 결국 그녀만의 예술 세계를 남긴 인물이었죠.

피카소를 떠난 유일한 여인, 스스로 길을 선택한 – 프랑수아즈 질로(Françoise Gilot)
1943년, 63세의 피카소는 작업장 근처 식당에서 21세의 젊은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납니다. 변호사를 꿈꾸며 법을 공부하던 질로는 화가의 길을 택한 인물이었는데요. 당시 질로는 자신보다 40살이나 많은 피카소에게 매료되었고, 피카소 역시 그녀의 젊음과 지적 매력에 끌렸습니다.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 조카와 함께 있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 Francoise Gilot, Golfe-Juan), 1948. Photo by Robert Capa.
이듬해부터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합니다. 10년 동안 함께하며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았죠. 피카소의 작품 속에서 질로는 ‘꽃의 여인’으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존재로 그려졌고, 두 아이 역시 그의 화폭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Pablo Picasso, <클로드와 팔로마를 안고 있는 프랑수와즈 Francoise, Claude and Paloma>, 1951. ©Pablo Ruiz Picasso net.
질로는 화가로서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예술가였습니다. 피카소의 곁에서 작업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다져나갔죠. 하지만 피카소의 사랑은 늘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질로를 찬미하며 사랑을 속삭였지만, 동시에 그녀를 억압하고 소유하려 했죠.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도 깊어지게 됩니다.
결국 1953년, 피카소가 자신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을 계기로 질로는 피카소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배신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질로는 오래전부터 피카소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걷고 싶어 했죠. 그녀는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에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를 떠납니다.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그녀가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지만 질로의 결심은 단호했어요. 그녀는 스스로 피카소를 떠난 유일한 여인이 됩니다.
이후 질로는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64년에는 피카소와 함께한 10년을 기록한 회고록 『피카소와 함께 산다는 것』을 출간했죠. 이 책은 피카소의 마초적인 성향과 여성 편력을 폭로하며 큰 화제를 모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피카소는 분노했습니다. 그녀를 향한 복수심에 두 자녀와의 만남마저 가로막았죠. 하지만 질로는 후회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피카소의 뮤즈로 남기를 거부한 여성이었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한 예술가였습니다.

마지막 뮤즈, 피카소의 그림자에 갇힌 여인 –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
1953년, 프랑수아즈 질로가 떠난 후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71세의 피카소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27세의 자클린 로크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스페인 여인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회고했죠. 당시 자클린은 어린 딸을 둔 이혼녀였고, 피카소는 그녀에게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쏟아냅니다.
두 사람은 1954년부터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피카소의 첫 아내 올가가 사망한 후 정식으로 결혼했죠. 40살이 훌쩍 넘는 나이 차이였지만, 스페인어에 능통했던 자클린은 피카소와 예술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며 내조에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피카소의 마지막 뮤즈이자 그의 말년을 함께한 인물이었죠.

피카소와 자클린 로크(Pablo Picasso & Jacqieline Roque), ©Edward Quinn.
피카소는 자클린을 위해 400점이 넘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녀는 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등장했죠. 때로는 우아한 실루엣으로, 때로는 해체된 형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피카소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한 누드 연작에서도 자주 보였죠. 그녀는 피카소가 노년에 들어서도 창작의 욕망을 불태울 수 있도록 만든 존재였습니다.

Pablo Picasso, <꽃을 들고 있는 자클린 Jacqueline with flowers>, 1954. ©Pablo Ruiz Picasso net.
하지만 자클린의 삶은 피카소를 만나면서 점점 그에게 종속되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피카소는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를 이어갔고, 자클린은 그를 지키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으며 외로운 삶을 택했죠. 피카소가 늙고 병들어갈수록 그녀는 그의 곁을 더욱 철저히 지켰지만, 결국 그가 남긴 것은 사랑이 아니라 끝없는 고립이었습니다.
1973년,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자 자클린은 그의 유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점점 무너져 갔어요.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그녀는 피카소가 없는 삶을 견디지 못했죠. 결국 1986년, 피카소의 생일날 그녀는 피카소가 묻힌 무덤 앞에서 권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는 유언대로 피카소와 함께 엑상프로방스의 성에 나란히 묻힙니다.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가 가장 많은 작품으로 남긴 마지막 뮤즈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삶에 가장 깊이 희생된 인물이기도 했죠.

예술과 뮤즈, 그리고 도덕성
예술가에게 사랑과 열정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며, 그 곁을 지키는 ‘뮤즈(Muse)’는 작품의 탄생과 변화를 이끄는 존재입니다. 역사 속 많은 예술가가 뮤즈와 함께했고, 그들과 나눈 사랑과 갈등, 환희와 절망은 후대에 걸작으로 남게 되었죠. 피카소 역시 그의 대표작 뒤에 늘 뮤즈들이 존재했고, 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예술적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청년 시절 만난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장미 시대와 입체주의 시대를 열었고, 에바 구엘은 입체주의를 꽃피웠습니다. 올가는 고전주의적 양식을 함께했고,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는 초현실주의 시대의 동반자였죠. 프랑수아즈 질로와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 예술의 정점에서 그의 창작열을 지켜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와 사랑을 나눈 여인들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발전시켰지만, 그의 곁에 있던 많은 이들은 버림받거나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죠. 마리 테레즈와 자클린은 결국 피카소 사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피카소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찾은 이는 프랑수아즈 질로가 유일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창작을 위한 열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윤리는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피카소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하듯, 그 뮤즈들의 이야기도 오래 기억되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를 마칩니다.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피카소는 역사상 여성 편력이 어마무시한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삶을 스친 여성은 100명이 넘는다고 해요.
2. 피카소는 첫 번째 뮤즈 올리비에와의 사랑을 통해 ‘장미 시대’로 화풍을 전환했습니다.
3. 올리비에에게 집착하던 피카소는 두 번째 뮤즈 에바 구엘을 소개받은 뒤 그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입체주의 화풍을 심화했죠.
4. 에바 구엘 사후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의 결혼을 계기로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마무리하고 고전주의로 전환하게 됩니다.
5. 올가와 별거하며 만난 17세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의 사랑은 피카소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며 초현실주의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6. 피카소의 다섯 번째 뮤즈 사진작가 도라 마르는 <게르니카> 작업에 기여했지만, 피카소의 냉대 속에서 고통받으며 <우는 여자>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7. 이후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났지만, 그녀는 피카소의 바람을 계기로 떠납니다. 질로는 스스로 피카소를 떠난 유일한 뮤즈였죠.
8.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의 마지막 뮤즈이자 두 번째 아내로, 그의 말년을 함께하며 400여 점의 초상화 모델이 되었습니다.
9. 피카소 사망 후 자클린은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외로움 속에서 결국 그의 무덤 앞에서 자살했습니다.
10. 피카소의 뮤즈들은 그의 예술적 변화를 이끌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뮤즈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들의 삶도 함께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처: Herbert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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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18 뮤즈들의 희생은 필연이었을까? 여인을 집어삼킨 거장,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 ©Herbert List/Magnum photos.
오늘의 레터에서는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와 그의 작품 세계를 뒤흔든 여인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누구나 한 번쯤 접해봤을 텐데요, 그의 작품 뒤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피카소는 평생 수많은 여성을 만났고, 사랑이 깊어질 때마다 화풍도 변했죠. 새로운 연인을 맞이할 때마다 예술적 전환점을 맞이했던 그는 사랑과 예술을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뮤즈들에게 피카소의 사랑은 축복이기만 했을까요? 피카소의 삶을 스쳐 간 여성은 1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7명의 여인은 그의 예술과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하지만 그 관계의 끝은 모두 같지 않았습니다. 영감을 준 뮤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희생된 이들도 있었죠.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 뒤에서 그를 사랑했던 여성들은 그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피카소의 예술과 그 이면을 전해드립니다.
피카소의 첫 번째 뮤즈, 그러나 갇혀 있던 여인 –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
Pablo Picasso, <솔레르씨의 가족 La famille Soler>, 1903. ©Musée des Beaux Arts.
1904년, 가난하고 외로웠던 피카소는 파리에서 그의 첫 번째 뮤즈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납니다. 어린 시절 불행한 결혼을 피해 파리로 도망친 올리비에는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며 자유를 꿈꾸던 여성이었죠. 붉은 머리와 균형 잡힌 몸매, 쾌활한 성격을 지닌 그녀는 피카소를 단숨에 매료시켰습니다. 올리비에는 후일 회고록에서 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올리비에와 사랑에 빠진 피카소는 우울하고 어두운 ‘청색 시대’를 마무리하고 따뜻한 색감이 돋보이는 ‘장미 시대’로 접어듭니다. 그녀는 피카소의 입체주의 실험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대표작인 <아비뇽의 처녀들>과 입체주의 조각 <여인의 상반신>의 모델이기도 했죠.
Pablo Picasso,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MoMA.
하지만 열정적인 사랑은 점점 집착과 갈등으로 변했습니다. 피카소는 올리비에를 강하게 소유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외출을 제한하며 점점 고립시켰죠. 올리비에 역시 피카소에게 충실하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1911년, 피카소의 두 번째 뮤즈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9년간의 동거는 막을 내리게 되었죠.
사랑인가, 탈출구인가? 올리비에가 남긴 두 번째 뮤즈 – 에바 구엘(Eva Gouel)
피카소의 집착은 점차 극단적으로 변했습니다. 올리비에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급기야 그녀를 집에 가두기까지 했죠. 지쳐버린 올리비에는 자신을 풀어줄 사람을 찾아 피카소에게 한 여자를 소개해 줍니다. 그녀가 바로 폴란드 출신 입체파 화가 루이 마르퀴스의 의붓딸, 에바 구엘이었어요. 그렇게 에바는 피카소의 두 번째 뮤즈가 됩니다.
피카소가 찍은 에바 구엘(Eva Gouel), 1912. Photo by Pablo Picasso.
올리비에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에바는 가정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다. 피카소를 조용히 돌봐주며 그의 삶에 안정을 더해줬죠. 덕분에 피카소는 작품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그의 입체주의 화풍도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좌: Pablo Picasso, <사랑하는 에바 J’aime Eva>, 1912. ©Musée Picasso. / 우: Pablo Picasso, <마 졸리 Ma Jolie>, 1911-1912. ©MoMA.
1912년에서 1914년 사이, 에바는 피카소의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중요한 모델이 되었어요. 그는 <사랑하는 에바>라는 작품에서 그녀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고, <마 졸리>에서는 그녀에 대한 애정을 그림 속에 담아냈죠. 하지만 피카소의 작품 속에서 에바는 직접적으로 그려지기보다 기타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로 상징되곤 했습니다.
피카소의 242 Boulevard Raspail에 있는 스튜디오, 1912. 출처: MoMA.
하지만 에바의 몸은 매우 허약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피카소와 함께 아비뇽에 머물던 그녀는 결국 병을 이기지 못했고, 1915년 12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겨우 서른의 나이였습니다. 에바는 피카소의 예술 세계에 깊은 울림을 남긴 뮤즈로 그의 작품 속에 영원히 새겨지게 됩니다.
세 번째 뮤즈이자 첫 결혼을 올린 여인 –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
피카소는 에바와 사별 후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든 파리의 카페 드 라 로통드(Café de la Rotonde)에 나와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왼쪽부터 화가 모딜리아니(Modigliani), 피카소(Picasso), 시인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 1916. Photo by 장 콕토(Jean Cocteau).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파리를 떠난 피카소는 1917년, 장 콕토와 함께 이탈리아 로마로 향합니다. 발레 공연 《퍼레이드》의 무대 장식을 맡게 된 그는 그곳에서 러시아 귀족 출신의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를 만나게 되죠.

피카소와 올가 코클로바(Picasso with Olga Hohlova in front of a poster of the ballet ‘Parade’), 1917. ©Pablo Ruiz Picasso net.
올가는 기품 있는 아름다움과 우아한 자태를 지닌 무용수였습니다. 피카소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열렬히 구애를 시작했죠. 하지만 올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결국 결혼을 조건으로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1918년, 37세의 피카소는 첫 아내가 된 올가와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죠.
Pablo Picasso, <안락의자에 앉은 올가의 초상 Portrait of Olga in an Armchair>, 191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올가와의 결혼은 피카소의 예술 세계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에서 벗어나 고전주의 화풍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녀는 그의 작품 속에서 중요한 모델이 되었죠. 우아한 몸선과 선명한 얼굴 윤곽을 지닌 올가는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품위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파리 라 보에티 거리에 있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며 상류층의 삶을 누렸어요. 피카소는 점차 부유한 생활에 익숙해졌고, 올가는 살롱을 운영하며 귀족적인 문화를 즐겼죠.
Pablo Picasso, <하레퀸으로 분장한 폴 Paul as harlequin>, 1924. ©Musée Picasso.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21년, 첫아들 파울로가 태어났지만 피카소는 여전히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의 기질로 인해 점점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는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 은밀한 관계를 맺었고, 이를 알게 된 올가는 큰 충격을 받아 아들과 함께 남프랑스로 떠나 별거를 시작했습니다. 올가는 이혼을 요구했지만, 피카소는 재산을 나누기 싫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죠. 시간이 흐르며 올가는 피카소의 혼외 자식까지 알게 되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그의 아내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알코올에 의존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그녀는 1955년, 암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피카소의 법적 아내로 남아 있게 되었죠.
천재의 뮤즈이자 희생자, 피카소 최고가 작품의 주인공 – 마리 테레즈 발테르(Marie-Thérèse Walter)
1927년, 마흔다섯의 피카소는 파리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17세의 금발 소녀 마리 테레즈 발테르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건강한 체격과 싱그러운 매력에 첫눈에 반한 그는 서점으로 데려가 자신이 등장하는 책을 보여주며 다가갔죠. 6개월간의 구애 끝에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지만, 당시 피카소는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 결혼한 유부남이었어요. 재산 문제로 이혼하지 않은 채 10년 동안 마리 테레즈와 은밀한 관계를 이어갔죠.
13세의 마레 테레즈 발테르, 1922. ©딸 마야 피카소.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이전 연인들과는 달랐어요. 금발의 젊은 여성이었던 그녀는 피카소에게 새로운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으며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이 자리 잡았죠. 피카소의 절친이자 사진작가 브라사이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1930년대,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 작품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신고전주의를 지나 초현실주의적 스타일을 실험하며 그녀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탐구했죠. 1931년, 피카소는 부아젤루에 성을 사들여 그녀와 함께 지내며 점점 더 그녀를 작품 속에 선명히 그려 넣기 시작했습니다.
좌: Pablo Picasso, <꿈 Le Rêve>, 1932. ©Tate Modern. / 우: Pablo Picasso, <누드, 초록 잎과 가슴 Nude, Green Leaves and Bust>, 1932. ©Christie’s.
1932년, 마리 테레즈가 피카소의 딸 마야를 임신했을 때 피카소는 <꿈>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피카소 작품 중 가장 관능적이고 서정적인 걸작으로, 이후 1억 5,500만 달러(약 1,720억 원)에 낙찰되며 그의 최고가 작품이 되었는데요. 빨간 안락의자에 앉아 깊이 잠든 그림 속 마리 테레즈의 모습은 부드러운 곡선과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육감적이면서도 꿈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죠. 같은 해 발표된 <누드, 초록 잎과 가슴> 역시 마리 테레즈를 향한 피카소의 집착과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좌: 마리 테레즈 발터와 딸 마야, ©Granger NYC/Rue des Archives. / 우: Pablo Picasso, <인형을 든 마야 Maya With Doll>, 1938. ©Pablo Ruiz Picasso net.
1935년,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두 번째 자녀 딸 마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1937년, 피카소의 새로운 연인 도라 마르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마리 테레즈는 점점 그의 삶에서 밀려났고, 둘의 사랑은 끝을 맞이했죠. 하지만 그녀는 평생 피카소를 잊지 못했어요. 17세 소녀 시절부터 그의 연인이었던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했죠. 그리고 1977년,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뒤, "피카소 곁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리 테레즈의 순수한 사랑과 피카소의 방탕한 삶이 맞물리며, 두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오네요.
'우는 여인’이 된 현실, 게르니카의 목격자 – 도라 마르(Dora Maar)
딸 마야가 태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1936년, 55세의 피카소는 시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26살 연하의 유고슬라비아 출신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를 만납니다. 이전 연인 마리 테레즈가 수줍고 순종적인 성향이었다면, 도라는 지적이면서도 강렬한 개성을 지닌 여성이었죠. 도라는 피카소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두 사람은 예술과 정치∙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빠르게 가까워집니다. 당시 피카소는 아내 올가와는 별거 중, 마리 테레즈와는 동거 중이었지만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도라와의 새 사랑을 시작했죠. 그렇게 도라는 피카소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맞이하게 됩니다.
<피카소와 도라 마르 Pablo Picasso & Dora Maar>, 1937. Photo by Man Ray.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나치의 폭격으로 ‘게르니카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접한 피카소는 분노와 절망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죠. 두 달 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가로 8m에 달하는 초대형 유화 <게르니카>를 공개하며 세상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피카소만의 강력한 선언이었죠.
Pablo Picasso, <게르니카 Guernica>, 1937. ©Museo Reina Sofia.
게르니카 작업을 하는 피카소, ©pablopicasso.org.
도라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며 사진으로 기록했어요. 그녀가 남긴 사진 덕분에 피카소의 창작 과정이 후대에 남겨졌고, <게르니카>는 예술 작품을 넘어 역사적 증거가 되었죠. 또한, 도라의 사진 속 강렬한 흑백 대비가 피카소의 작품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Pablo Picasso, <우는 여인 Femme en pleurs>, 1937. ©Tate Modern.
피카소는 도라를 선택하며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도라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피카소의 냉대도 시작되었죠. 피카소는 그녀의 감정을 거침없이 소모했고, 그녀가 눈물을 보이면 오히려 흥미를 느꼈습니다. 도라가 절망에 빠져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도 위로는커녕 그녀의 고통을 담은 작품 <우는 여자>를 완성했죠. 정면을 응시하는 눈과 옆을 향한 입, 일그러진 얼굴은 도라의 비탄을 날것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10년 가까이 연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피카소는 또 다른 젊은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며 도라를 밀어냈어요. 이별 후 도라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지만 다시 예술 활동을 재개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세상은 그녀를 <우는 여자>로 기억하지만, 도라는 피카소의 예술에 깊은 흔적을 남긴 예술가이자 사진가였습니다. 누구보다 강렬하게 사랑했고, 누구보다 깊이 상처받았지만, 결국 그녀만의 예술 세계를 남긴 인물이었죠.
피카소를 떠난 유일한 여인, 스스로 길을 선택한 – 프랑수아즈 질로(Françoise Gilot)
1943년, 63세의 피카소는 작업장 근처 식당에서 21세의 젊은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납니다. 변호사를 꿈꾸며 법을 공부하던 질로는 화가의 길을 택한 인물이었는데요. 당시 질로는 자신보다 40살이나 많은 피카소에게 매료되었고, 피카소 역시 그녀의 젊음과 지적 매력에 끌렸습니다.
이듬해부터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합니다. 10년 동안 함께하며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았죠. 피카소의 작품 속에서 질로는 ‘꽃의 여인’으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존재로 그려졌고, 두 아이 역시 그의 화폭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Pablo Picasso, <클로드와 팔로마를 안고 있는 프랑수와즈 Francoise, Claude and Paloma>, 1951. ©Pablo Ruiz Picasso net.
질로는 화가로서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예술가였습니다. 피카소의 곁에서 작업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다져나갔죠. 하지만 피카소의 사랑은 늘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질로를 찬미하며 사랑을 속삭였지만, 동시에 그녀를 억압하고 소유하려 했죠.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도 깊어지게 됩니다.
결국 1953년, 피카소가 자신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을 계기로 질로는 피카소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배신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질로는 오래전부터 피카소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걷고 싶어 했죠. 그녀는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에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를 떠납니다.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그녀가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지만 질로의 결심은 단호했어요. 그녀는 스스로 피카소를 떠난 유일한 여인이 됩니다.
이후 질로는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64년에는 피카소와 함께한 10년을 기록한 회고록 『피카소와 함께 산다는 것』을 출간했죠. 이 책은 피카소의 마초적인 성향과 여성 편력을 폭로하며 큰 화제를 모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피카소는 분노했습니다. 그녀를 향한 복수심에 두 자녀와의 만남마저 가로막았죠. 하지만 질로는 후회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피카소의 뮤즈로 남기를 거부한 여성이었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한 예술가였습니다.
마지막 뮤즈, 피카소의 그림자에 갇힌 여인 –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
1953년, 프랑수아즈 질로가 떠난 후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71세의 피카소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27세의 자클린 로크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스페인 여인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회고했죠. 당시 자클린은 어린 딸을 둔 이혼녀였고, 피카소는 그녀에게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쏟아냅니다.
두 사람은 1954년부터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피카소의 첫 아내 올가가 사망한 후 정식으로 결혼했죠. 40살이 훌쩍 넘는 나이 차이였지만, 스페인어에 능통했던 자클린은 피카소와 예술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며 내조에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피카소의 마지막 뮤즈이자 그의 말년을 함께한 인물이었죠.
피카소와 자클린 로크(Pablo Picasso & Jacqieline Roque), ©Edward Quinn.
피카소는 자클린을 위해 400점이 넘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녀는 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등장했죠. 때로는 우아한 실루엣으로, 때로는 해체된 형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피카소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한 누드 연작에서도 자주 보였죠. 그녀는 피카소가 노년에 들어서도 창작의 욕망을 불태울 수 있도록 만든 존재였습니다.
Pablo Picasso, <꽃을 들고 있는 자클린 Jacqueline with flowers>, 1954. ©Pablo Ruiz Picasso net.
하지만 자클린의 삶은 피카소를 만나면서 점점 그에게 종속되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피카소는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를 이어갔고, 자클린은 그를 지키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으며 외로운 삶을 택했죠. 피카소가 늙고 병들어갈수록 그녀는 그의 곁을 더욱 철저히 지켰지만, 결국 그가 남긴 것은 사랑이 아니라 끝없는 고립이었습니다.
1973년,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자 자클린은 그의 유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점점 무너져 갔어요.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그녀는 피카소가 없는 삶을 견디지 못했죠. 결국 1986년, 피카소의 생일날 그녀는 피카소가 묻힌 무덤 앞에서 권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는 유언대로 피카소와 함께 엑상프로방스의 성에 나란히 묻힙니다.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가 가장 많은 작품으로 남긴 마지막 뮤즈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삶에 가장 깊이 희생된 인물이기도 했죠.
예술과 뮤즈, 그리고 도덕성
예술가에게 사랑과 열정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며, 그 곁을 지키는 ‘뮤즈(Muse)’는 작품의 탄생과 변화를 이끄는 존재입니다. 역사 속 많은 예술가가 뮤즈와 함께했고, 그들과 나눈 사랑과 갈등, 환희와 절망은 후대에 걸작으로 남게 되었죠. 피카소 역시 그의 대표작 뒤에 늘 뮤즈들이 존재했고, 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예술적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청년 시절 만난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장미 시대와 입체주의 시대를 열었고, 에바 구엘은 입체주의를 꽃피웠습니다. 올가는 고전주의적 양식을 함께했고,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는 초현실주의 시대의 동반자였죠. 프랑수아즈 질로와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 예술의 정점에서 그의 창작열을 지켜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와 사랑을 나눈 여인들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발전시켰지만, 그의 곁에 있던 많은 이들은 버림받거나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죠. 마리 테레즈와 자클린은 결국 피카소 사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피카소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찾은 이는 프랑수아즈 질로가 유일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창작을 위한 열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윤리는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피카소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하듯, 그 뮤즈들의 이야기도 오래 기억되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를 마칩니다.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피카소는 역사상 여성 편력이 어마무시한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삶을 스친 여성은 100명이 넘는다고 해요.
2. 피카소는 첫 번째 뮤즈 올리비에와의 사랑을 통해 ‘장미 시대’로 화풍을 전환했습니다.
3. 올리비에에게 집착하던 피카소는 두 번째 뮤즈 에바 구엘을 소개받은 뒤 그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입체주의 화풍을 심화했죠.
4. 에바 구엘 사후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의 결혼을 계기로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마무리하고 고전주의로 전환하게 됩니다.
5. 올가와 별거하며 만난 17세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의 사랑은 피카소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며 초현실주의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6. 피카소의 다섯 번째 뮤즈 사진작가 도라 마르는 <게르니카> 작업에 기여했지만, 피카소의 냉대 속에서 고통받으며 <우는 여자>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7. 이후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났지만, 그녀는 피카소의 바람을 계기로 떠납니다. 질로는 스스로 피카소를 떠난 유일한 뮤즈였죠.
8.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의 마지막 뮤즈이자 두 번째 아내로, 그의 말년을 함께하며 400여 점의 초상화 모델이 되었습니다.
9. 피카소 사망 후 자클린은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외로움 속에서 결국 그의 무덤 앞에서 자살했습니다.
10. 피카소의 뮤즈들은 그의 예술적 변화를 이끌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뮤즈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들의 삶도 함께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처: Herbert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