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8 시대를 활용해 작품을 생산한 남자, 앤디 워홀(Andy Warhol)

섬네일 출처 : The New Yorker



vol 28. 시대를 활용해 작품을 생산한 남자, 앤디 워홀(Andy Warhol)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에 대해 알아봅니다!


출처 : MoMA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어김없이 아트 레터가 도착했습니다. 지난 레터들은 잘 읽어 보셨나요? 지난 레터를 통해 꾸준히 미국 근현대 미술에 대해 소개를 해드리고 있는데요. 오늘도 “어김없이” 미국의 작가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이미 위 그림만으로도 오늘 소개해드릴 작가가 누구신지 감이 오시죠? 바로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내용은 지난 <Vol.22 생각말고, 느끼세요. 마크 로스코의 추상회화>과 흐름을 나누는 컨텐츠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을 통해 아시게 될 거예요.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보겠습니다!


먼저 보고 들어가는
세 가지 키워드 💁


1. 실크 스크린(Silk Screen)

실크 스크린이라는 표현 기법이 있어요. 대량 생산에 용이한 방식인데요. 미리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물감을 얹어서 찍어내는 기법이라고 생각하시면 쉬워요. 앤디 워홀의 대표작 대부분은 실크 스크린을 통해 표현됐어요. 이는 당시 미국의 산업화에 따른 대량 생산을 연상시키는 기법이었죠.


2. 대량 생산과 매스 미디어

앤디 워홀이 활동했을 당시의 미국은 유례없는 호황기였어요. 대량 생산과 매스 미디어의 발달로 소비를 촉진시키던 시대였죠. 무분별하게 생산되고, 개체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시대를 앤디 워홀은 곱지 않게 바라봤어요. 이러한 회의감이 그의 작품관 구축해냈죠. 그래서 워홀은 자신의 회의감을 기계적으로 활용해 풍자적인 작품들을 양산해냈습니다.


3. 더 팩토리(The Factory)

앤디 워홀의 작업실의 이름은 더 팩토리(The Factory)였어요. 말 그대로 ‘공장’을 의미했죠. 대량 생산과 소비로 인한 산업화에 맞춰 획일화된 작품을 마치 양산하는 듯한 방식으로 작업했기 때문이에요. 이런 더 팩토리는 앤디 워홀의 브랜드를 공고히 만들어준 요새임과 더불어 당대 아티스트들과의 교류의 장이었어요.



❤️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어머니.


어머니 줄리아 워홀라(Julia Warhola)와 앤디 워홀(Andy Warhol), 출처 : Sotheby’s


앤디 워홀의 미술사적 출발점은 그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단연코 빼놓을 수가 없네요. 어린 시절 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앤디 워홀의 가정은 그다지 형편이 좋지 않았어요. 그 와중에 워홀은 그림에 소질과 관심을 보였고, 그를 통찰한 그의 어머니 줄리아 워홀라(Julia Warhola)는 돈을 버는 족족 워홀이 그림을 그리거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해요. 말 그대로 물심양면이었죠. 비단 어린 시절 뿐 아니라 그가 나중에 뉴욕으로 진출할 당시에도 동행하며 끝까지 아들의 활동에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 Keypoint

1. 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앤디 워홀의 집안은 넉넉치 못했어요.

2. 가난에도 불구하고 앤디 워홀의 재능과 관심을 알아본 그의 어머니는 물심양면으로 그의 꿈을 지지해줬습니다.

3. 그의 어머니는 물리적인 지지를 넘어 앤디 워홀이 뉴욕으로 진출할 당시에도 동행하며 정신적인 지지를 가져다 주었어요.




👠 성공한 광고 일러스트레이터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던 앤디 워홀 / 출처 : Merritt Gallery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유명 작가의 작품은 그들이 켜켜이 쌓은 경험과 성장을 통해 만들어진 산물이잖아요. 앤디 워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처음부터 실크 스크린이나 영화 제작을 하진 않았거든요. 실질적으로 그가 이름을 알리게 된 다른 계기가 있었어요. 그건 바로 광고 삽화였습니다.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 신발 광고를 만들던 워홀은 1950년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고 이를 발판으로 예술계에 데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62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설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죠. 바로 <Campbell’s Soup Cans>입니다.



앤디 워홀을 대표하는 작품, <Campbell’s Soup Cans> / 출처 : Phaidon


로스엔젤레스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된 이 작품은 개별 판매로 시작을 알렸어요. 그러다가 전시 기간 중, 이 작품은 개별이 아닌 함께 모여 있을 때 더 가치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워홀은 팔린 제품을 다시 구매, 32개를 하나의 세트로 판매 전시를 하게 됩니다.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았죠. 결국 이 세트 작품은 훗날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150억원에 구매하는 엄청난 역작으로 남게 됩니다.



모두가 같지만, 모두가 같지 않은 작품. , 출처 : Phaidon


위 작품에 대해선 정말 말이 많았어요. 가장 흔한 비판은 “이게 무슨 예술이야!”라는 의구심이었구요. 맞아요. 그래봤자 수프캔 32개 그려 놓고 작품이라 전시하고 판매한다는 게 우스꽝스러울 순 있죠. 그래서 당시 이를 풍자하는 일러스트들이 줄을 이었고 워홀을 향한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디 워홀은 위 작품으로 스타덤에 오르고 결국 팝아트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까지 얻어냈죠.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 작품이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아요! 호황과 발전으로 대량생산과 소비를 부추기던 사회상을 꼬집었다는 해석도 존재하거든요. 개성은 사라지고 번호(모델넘버)만 매겨지는 미국의 문화적 속성을 비판하는 출발점이라는 평가도 있죠. 그래서 위 32개의 작품은 마치 대량생산을 한 작업 같아 보이지만 각각 그려냈기 때문에 가까이서 보면 다른 작품이라는데서 워홀은 풍자를 담아냈어요. 워홀은 흔해 빠진 소재를 단순하게 그려낸 스토리텔러를 넘어 시대를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였던거죠.



⏳ Keypoint

1. 앤디 워홀은 유명 브랜드들과 함께 협업하며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것이 예술계의 등용문이 되었죠.

2. 1962년, 앤디 워홀의 대표작이 탄생합니다. 수프 깡통 32개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 전시한 <Campbell’s Soup Cans>이 그 주인공이죠.

3. <Campbell’s Soup Cans>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미국의 대량 생산과 소비 종용에 의한 정체성 부재를 꼬집었던 작품으로 평가되어요. 모두가 같아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르다, 이런 식으로요.




🙆🏻‍♂️ 시대를 거부하지 않고 이용한 아티스트

당시 미국의 호황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앤디 워홀의 <Dollar Sign> / 출처 : Sotheby’s


미국의 경제 호황기에 활동했던 워홀은 돈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내비치며 달러 사인($) 자체를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그는 사회의 흐름에 맞서기 보다는 변화 자체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작가였던 것이죠. 앞서 설명한 <Campbell’s Soup Cans>도 같은 맥락이었구요. 그런데 잠깐! 광고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했던 그가 이런 미국의 문화를 꼬집고, 통찰했다는 이유만으로 현대 미술계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걸까요?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죠. 그가 각광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로 팝아트(Pop Art)의 태동이죠.



미국 팝아트의 한 축을 맡았던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 출처 : The Independent


팝아트란 ‘Popular Art’ 즉, ‘대중 예술’을 뜻해요. 쉽게 말해 대중들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의미하죠. 그래서 만화나 동화, 일상적 소재들을 주로 사용한 작품들이 다수였어요. 워홀의 <Campbell’s Soup Cans>도 미국 내에서 가장 흔한 식품 중 하나였으니 말이 되죠. 희귀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지만, 흔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흐름이라고 보면 쉬워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유명했던 미국 추상회화의 대표 작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작품 / 출처 : MoMA


사실 팝아트가 탄생한 결정적인 계기는 추상회화 때문이었어요. 아트아트 인스타그램이나 레터를 통해 설명했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등의 추상회화는 현대미술의 거점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기는데 혁혁한 공헌을 했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 난해하고 어렵다는 지적으로 인해 많은 관람객들이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 빈틈을 뚫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실현한 것이 팝아트라 볼 수 있죠.



앤디 워홀도 인정하게 만든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M- Maybe> / 출처 : Wikioo


그런 팝아트의 선두에는 앤디 워홀이 있었고요. 그도 만화와 같은 소재를 주로 사용하곤 했는데 동일한 소재를 사용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과는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 이후 만화가 아닌 실크 스크린(Silk Screen)과 같이 시대상을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앤디 워홀의 묘수였죠.


* 실크 스크린(Silk Screen)

나무 또는 금속의 테에 붙인 비단, 나일론, 테트론, 스테인리스 스틸 등의 가는 구멍을 통하여 스퀴저로 잉크나 화구(물감)를 판 아래 놓인 소재에 직접 인쇄하는 기법. 대량 생산에 용이한 방식이다.



미국의 유명배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를 이용한 <Marilyn Diptych> / 출처 : Smart History


그 이후로도 워홀은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재클린 케네디 등 유명 스타와 같이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물과 소재들을 적극활용하여 예술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앤디 워홀은 팝아트의 흐름을 더욱 발전시키게 되죠.


⏳ Keypoint

1. 앤디 워홀이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팝아트(Pop Art)의 태동 덕분이었어요.

2. 팝아트는 ‘Popular Art’ 즉, 대중 예술을 뜻합니다. 대중들이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을 말해요.

3. 당시 추상회화가 주류를 이뤘지만 너무 난해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친숙한 팝아트가 주류로 발돋움할 수 있었어요.

4. 팝아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했는데 앤디 워홀은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다른 표현 방식으로 팝아트를 구현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것이 실크 스크린 기법이었어요.



⚙️ 미국 사회를 닮아 있던 그의 작업실, 더 팩토리(The Factory)


실크 스크린으로 획일화된 작품을 양산했던 그의 스튜디오 / 더 팩토리(The Factory), 출처 : Sotheby’s


예술가의 스튜디오 이름이 공장이라고? 뭔가 좀 이상하죠. 그러나 앤디 워홀의 스튜디오는 그렇게 불릴만도 했어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실크 스크린을 통해 친숙한 소재를 양산하는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잖아요. 어떤 면에선 대량 생산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모습과 닮아 있었죠. 이를 착안하여 워홀은 자신의 스튜디오를 더 팩토리(The Factory)로 지은 겁니다.



더 팩토리에서 작업 중인 앤디 워홀 / 출처 : Master Works Fine Art


더 팩토리의 실내는 온통 알루미늄 포일은색 물감으로 덮여져 있었어요. 정말 마치 공장에 온 듯한 느낌이었죠. 그리고 그 안에선 고용한 조수들을 시켜 실크 스크린으로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기계처럼 많은 예술 작품들을 쏟아냈습니다. 대략 2년동안 생산된 실크 스크린 작업은 2,000점이 넘는 것으로 확인되었죠. 그렇게 팩토리는 앤디 워홀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매스 미디어에도 관심이 많았던 앤디 워홀 / 출처 : i-D Magazine


팩토리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분야의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던 건 창작하는 장소를 그들과 함께 점유하고, 교류를 이어갔기 때문이었어요. 이를 통해 워홀은 팩토리에서 실크 스크린은 물론 실험적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죠. 앤디 워홀은 그렇게 멀티테이너로 발돋움합니다.

⏳ Keypoint

1. 워홀은 실크 스크린을 기반으로 작품을 양산해내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더 팩토리로 명명합니다.

2. 이곳에선 수많은 작품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소통하며 워홀의 브랜드 가치를 공고히 했죠.

3. 더불어 실크 스크린 작업은 물론 영화 제작 등까지 진행하며 멀티테이너로 발돋움합니다.




🔫 갑작스레 닥쳐온 비극


작가로 활동했었던 밸러리 솔라나스 (Valerie Solanas) / 출처 : The New York Times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하던 앤디 워홀에게 악연이 들이 닥쳤어요. 그 상대는 바로 작가였던 밸러리 솔라니스(Valerie Solanas)인데요. 그녀는 워홀에게 자신의 작품을 공연화하길 요청했지만 내용이 너무 외설적인 이유로 워홀은 제작을 보류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그녀는 더 팩토리에서 워홀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이 총격으로 워홀은 중상을 입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심신미약을 이유로 3년동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게 전부였죠.



장애와 후유증을 겪게된 앤디 워홀 / 출처 : Revolver Gallery


이 사고로 워홀은 평생 의료용 보호대를 차고 살아야 하는 장애를 겪게 되었어요. 더불어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되었죠. 큰 수술 이후 어느정도 회복세를 보이긴 했지만 좋지 않은 식습관과 불규칙적인 생활 때문에 합병증이 도졌고, 담낭 염증 수술 후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5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팝아트의 거장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지 않은 말 그대로 허무한 결말이었죠.



⏳ Keypoint

1. 앤디 워홀은 한 작가의 대본을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거절, 작가는 앙심을 품고 워홀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2. 중상을 입은 워홀은 회복세를 다졌으나 합병증 및 담낭 염증 제거 수술 후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58세에 사망합니다.




⏳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는 아티스트, 그냥 즐기면 됩니다.


중국의 마오쩌둥을 활용한 작품 <Mao> / 출처 : Portland Art Museum


예술에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는 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예술 또한 사랑 받아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내포된 의미를 넘어 즐길 수 있는 소재라면 충분히 예술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앤디 워홀의 작품이 대표적이죠. 앞선 내용처럼 그는 미국의 시대상을 절묘하게 활용하여 대중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팝아트로 각색,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고 큰 명예를 얻어냈죠. 물론 그의 작업이 과거의 인상주의나 큐비즘과 같이 고도의 붓질을 통한 작업물이 아닌 실크 스크린을 통한 양산이었지만 대중들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충분히 즐겼기 때문에 그의 작품도 예술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각자의 주관이 판단할 문제이지만요.


어쨌든 앤디 워홀의 예술사적 의미는 대중들이 예술에 조금 더 흥미를 느끼고, 가까이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데 있습니다. 한폭의 멋진 그림을 통한 깊은 감동은 부재됐어도 그의 작품의 역할은 현대 미술에서 큰 공헌을 했으니깐요. 머리로 해석하려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 즐기면 그만입니다! 여러분들의 즐거운 문화 생활은 그렇게 더욱 깊이를 다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애정 어린 관심과 향유를 아트아트에서 좀 더 쉽고 유익하게 도와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안녕!



⌛아팅이와 함께 보는 오늘의 내용


1. 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앤디 워홀의 집안은 넉넉치 못했어요.

2. 가난에도 불구하고 앤디 워홀의 재능과 관심을 알아본 그의 어머니는 물심양면으로 그의 꿈을 지지해줬습니다.

3. 물리적인 지지를 넘어 앤디 워홀이 뉴욕으로 진출할 당시에도 동행하며 정신적인 지지를 가져다 주었어요.

4. 앤디 워홀은 유명 브랜드들과 함께 협업하며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것이 예술계의 등용문이 되었죠.

5. 1962년, 앤디 워홀의 대표작이 탄생합니다. 수프 깡통 32개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 전시한 <Campbell’s Soup Cans>이 그 주인공이죠.

6. <Campbell’s Soup Cans>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미국의 대량 생산과 소비 종용에 의한 정체성 부재를 꼬집었던 작품으로 평가되어요. 모두가 같아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르다, 이런 식으로요.

7. 앤디 워홀이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팝아트(Pop Art)의 태동 덕분이었어요.

8. 팝아트는 ‘Popular Art’ 즉, 대중 예술을 뜻합니다. 대중들이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을 말해요.

9. 당시 추상회화가 주류를 이뤘지만 너무 난해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친숙한 팝아트가 주류로 발돋움할 수 있었어요.

10. 팝아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했는데 앤디 워홀은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다른 표현 방식으로 팝아트를 구현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것이 실크 스크린 기법이었어요.

11. 워홀은 실크 스크린을 기반으로 작품을 양산해내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더 팩토리로 명명합니다.

12. 이곳에선 수많은 작품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소통하며 워홀의 브랜드 가치를 공고히 했죠.

13. 더불어 실크 스크린 작업은 물론 영화 제작 등까지 진행하며 멀티테이너로 발돋움합니다.

14. 앤디 워홀은 한 작가의 대본을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거절, 작가는 앙심을 품고 워홀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15. 중상을 입은 워홀은 회복세를 다졌으나 합병증 및 담낭 염증 제거 수술 후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58세에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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