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17 마릴린 먼로를 상품화한 예술가, 앤디 워홀 |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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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17 마릴린 먼로를 상품화한 예술가, 앤디 워홀


캠벨 수프를 들고 있는 워홀, ©Andrew Unangst/Alamy.


오늘의 레터 속 인물은 ‘앤디 워홀’입니다. 

이전의 레터에서 앤디 워홀의 삶과 그의 전반적인 작품 세계를 다뤘다면, 오늘은 앤디 워홀과 그의 작품 속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해요.

워홀에 대해 잘 모르신다면, <vol 28. 시대를 활용해 작품을 생산한 남자, 앤디 워홀(Andy Warhol)>을 먼저 읽고 넘어와도 좋겠습니다.


소비사회가 만든 예술가, 앤디 워홀


앤디 워홀은 사업가이자 예술가였어요. 워홀에게 미술은 표현 수단을 넘어 비즈니스와 연결된 것이었죠. 그는 미술이 돈이 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이를 활용해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합니다.


워홀의 작품 세계는 1960년대 미국의 물질문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어요. 당시 미국 사회는 경제적 호황을 맞이하며 소비문화가 급격히 확산되었습니다. 대중매체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죠. 전 가구의 90%가 텔레비전을 보유한 시대였고, 광고와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장악했어요. 워홀이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더 팩토리에서 작업 중인 앤디 워홀, ©Master Works Fine Art.


상업 미술가로 출발한 워홀은 기존의 예술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어요. 하루 종일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해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팩토리에서 여러 명의 조수를 고용해 대중매체에서 얻은 이미지를 작품으로 변환했고, 워홀은 아이디어를 내는 역할을 맡은 것이죠.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예술이 작가의 손길로 완성된다는 개념을 깨뜨리는 것이자 소비사회와 기계적인 생산 시스템을 그대로 반영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실크스크린 작업을 진행하는 앤디 워홀, ©Hamilton-Selway.

이처럼 워홀은 철저히 대중적이고 반복 가능한 이미지를 통해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허물었어요. 그리고 그 전략은 그가 선택한 '대상'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워홀이 대량 생산한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마릴린 먼로의 초상이죠.


당대 최고의 섹스 심볼, 마릴린 먼로의 죽음을 예술로 승화하다


워홀은 왜 마릴린 먼로를 선택했을까요? 그에게 마릴린 먼로는 19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이미지'였습니다. 


생애 샤넬 No.5 향수를 사랑했던 마릴린 먼로의 모습, ©Bob Beerman.


“아시잖아요, 사람들이 종종 질문하는 것들.. '잘 때는 뭘 입으시나요? 파자마 윗옷? 파자마 바지? 아니면 나이트가운?'
그래서 전 샤넬 No.5 라고 했죠. 사실이거든요. 누드라고 말하기 좀 그렇잖아요. 아시잖아요? 하지만, 사실인걸요.”
- 1960년 4월, 프랑스 잡지 '마리끌레르'와 인터뷰 中


©CHANEL YouTube.


먼로는 당대 최고의 섹스 심볼이자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아이콘이었어요. 하지만 워홀이 주목한 건 그녀의 삶이 아닌, 그녀가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소비되었는가'였습니다. 먼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실제 삶이나 고통보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완벽한 금발 미녀'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소비했어요. 워홀은 이 점을 간파하고 먼로의 얼굴을 이용한 실크스크린 작품을 제작했죠. 그녀의 상징적인 사진을 기반으로 색상을 변형하고 반복적으로 찍어내며 먼로를 개인이 아닌 '상품화된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62년 8월에 실크스크린 작업을 시작했다. (중략)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간단했다. 나는 그것에 감격했다. 스크린에 대한 나의 첫 실험은 Troy Donahue와 Warren Beatty의 수장이었고 그다음 Marilyn Monroe가 우연히 그달에 죽을 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스크린에 담아보자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첫 번째 마릴린이다.”
- 앤디 워홀(Andy Warhol)


그렇게 1962년, 먼로가 세상을 떠난 지 채 3주도 되지 않아 그녀의 초상화가 워홀의 작품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먼로에 대한 헌사와 추모가 아닌, 스타의 삶과 죽음마저도 상품처럼 소비되는 시대를 날카롭게 포착한 워홀식 해석이었죠.


워홀이 먼로를 통해 던진 메시지


©MarilynMonroeOnline YouTube.


당시 먼로의 흑백 보도 사진, ©Gene Kornman.


워홀은 그녀의 출세작, 영화 <나이아가라>에서 홍보용으로 삼았던 흑백 보도 사진을 이용했습니다. 사진을 클로즈업하고 그 위에 블루, 옐로우, 그린 등의 색을 입혀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냈죠. 이 방식은 그녀의 삶과 죽음을 대비적으로 보여준 첫 작품 <마릴린 두 폭 제단화>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50개의 동일한 이미지를 컬러와 흑백으로 나눠 배치해 대중이 사랑한 스타의 화려한 모습과 그 이면의 비극을 동시에 표현했죠.


Andy Warhol, <마릴린 두 폭 제단화 Marilyn Diptych>, 1962. ©Tate Modern.


당시 실크스크린은 상업용 인쇄술이었습니다. 워홀은 이를 활용해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기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대량 생산 시대의 몰개성화와 인간의 상품화를 날카롭게 드러냈죠.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먼로를 향한 애도의 감정을 배제한 듯 보이게 했고, 작품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Andy Warhol, <골드 마릴린 Gold Marilyn Monroe>, 1962. ©MoMA.

같은 해, 워홀은 <골드 마릴린>이라는 또 다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먼로의 얼굴이 금색 캔버스 중앙에 배치되어 부유하게 떠 있는 게 특징으로, 성모 마리아 대신 헐리우드 스타를 신격화한 듯한 연출로 황금만능주의 시대의 소비문화를 반영했죠.


Andy Warhol,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Shot Sage Blue Marilyn>, 1964. ©dailymail.co.uk.


Andy Warhol, <캠벨 수프 캔 Campbell's Soup Cans>, 1962. ©MoMA.


1964년 작 <샷 세이지 블루 매릴린>은 워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캠벨 수프 캔>과 함께 팝아트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2022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9,500만 달러(한화 약 2,500억 원)에 낙찰되며 현대 미술 시장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죠. 


대량 생산 시대의 예술


실크스크린 작업을 보는 앤디 워홀, ©Bob Adelman/Corbis.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같은 이미지를 빠르고, 대량으로 생산하며 '예술을 상품화'했습니다. 독창성과 유일성을 중시하던 기존 미술계의 관념을 뒤집어 버리고 미술품의 소유 개념까지 변화시켜 버렸죠.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저속한 상업 예술로 치부했지만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열광했어요. 워홀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분홍빛이 도는 마릴린 먼로, 1962. ©Bert Stern/APPhotograph.


여전히 마릴린 먼로는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섹스 심벌로 남았지만, 워홀의 작품을 통해 그녀는 '영원히 소비되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워홀이 만들어낸 대중문화와 대량생산의 개념은 먼로를 더욱 입지적인 아이콘으로 만들었고, 그녀의 이미지는 지금도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죠. 워홀의 작품은 당대에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 앞서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도 그의 작품은 예술과 소비, 상업성과 예술성의 경계를 탐구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워홀의 시선 속 마릴린 먼로가 더욱 또렷해졌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를 마칩니다.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앤디 워홀은 사업가이자 예술가였습니다. 그에게 미술은 표현 수단을 넘어 비즈니스와 연결된 것이었죠.

2. 워홀의 작품 세계는 1960년대 경제적 호황기를 누리고 있던 미국의 물질만능주의 문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어요.

3. 상업 미술가로 출발한 워홀은 기존 예술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4. 하루 종일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해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했죠.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예술이 작가의 손길로 완성된다는 개념을 깨뜨리는 것이자, 소비사회와 기계적인 생산 시스템을 그대로 반영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5. 워홀의 이러한 전략은 그가 선택한 '대상'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의 초상이었죠.

6. 마릴린 먼로 사망 당시, 워홀은 그녀의 사망조차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완벽한 금발 미녀’의 이미지로 소비된다는 점에 포착해 작업했습니다.

7. 워홀은 마릴린 먼로의 초상을 활용해 대중이 사랑한 스타의 화려한 모습과 그 이면의 비극, 황금만능주의 시대의 소비문화를 조명했죠.

8. 오늘날 워홀은 독창성과 유일성을 중시하던 기존 미술계의 관념을 뒤집고 미술품의 소유 개념까지 변화시킨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9. 실제로 워홀의 작품과 그의 작품 속 마릴린 먼로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있죠.

10. 워홀의 작품은 당대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 앞서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처: Tat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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