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레터 vol.6

사랑이 전부였던 천재

이중섭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사랑을 그려낸 천재 작가


이중섭, 세 가지 키워드!



🐮

이중섭의 <소> 연작이 유명한 이유는 그가 다작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중섭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의미가 서려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난💰

유복했던 집안의 자제였던 이중섭은 남북전쟁, 원산폭격 그리고 피난 등으로 인해 가난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실험 정신과 혼을 담아낸 그의 작업에서는 그가 얼마나 예술을 사랑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가족👪

이중섭에게 가족은 각별한 의미였습니다. 피난 당시 일본으로 넘어간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다독이기 위해 그렸던 <아이들>과 <은지화>는 그가 가족을 지독히도 사랑했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조선인 다운 그림을 그려라!

그의 미술적 근간이 되어준 <오산 학교>🏫


이중섭 하면 ‘가난’을 떠올리기 쉬운데요. 사실 알려진 것에 비해 이중섭은 굉장히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평원 출신의 이중섭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지주 집안이었고, 어머니도 부잣집의 딸이었죠. 이중섭의 12살 터울 형은 훗날 백화점까지 차리며 꾸준하게 윤택한 생활을 유지해옵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집안에서도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중섭은 민족주의 계열의 학교로 분류되는 ‘오산학교’로 입학하게 되죠. 그때 이중섭은 인생의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주의 계열의 <오산학교>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주의 계열의 <오산학교>

오산학교에서 만난 스승, 임용련 👨‍🏫


임용련은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 번쯤은 주목해야할 비운의 천재 작가다.
임용련은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 번쯤은 주목해야할 비운의 천재 작가다.



임용련. 1900년대 초반 미국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해 유럽에서 1여 년 동안 유학을 다녀온 천재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그는 중국으로 망명한 전력이 있었고, 자신이 갈고닦아온 재능을 국가를 위해 써야 된다는 사명으로 오산학교의 선생으로 부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중섭은 임용련으로부터 후기 인상파와 야수파의 화조를 배울 수 있었고 특히 ‘조선인은 조선인 다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사명을 물려받기도 했습니다.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과의 결혼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과의 결혼



임용련은 이중섭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를 만개하기 위해선 세상의 다양한 문화를 접해야 한다며 일본 유학을 권했고, 이중섭은 일본의 아방가르드 계열 학교였던 문화학원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때 자유로운 화풍에 대한 에너지를 얻은 이중섭은 더욱더 굵고, 간결한 선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추후 빛을 발한 은지화 또한 이 시기에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Keypoint☝🏻

 

💰 이중섭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 그는 미술을 배우기 위해 민족주의 계열, <오산학교>를 다녔습니다.

👨🏻‍🏫 천재 서양화가 <임용련>은 이중섭의 스승입니다.

🇯🇵 임용련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그곳에서 훗날 아내가 된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납니다.




이중섭 = 🐂


이중섭이 ‘소’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본을 다지기 위해 많은 습작이 필요했던 그에게 눈에 띈 건 '소'였어요. 1900년대에는 대부분이 농경지역이었기에 ‘황소’는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흔한 동물이었고, 쉽게 눈에 띄는 소는 이중섭이 습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피사체였습니다. 더불어 ‘황소’는 우리나라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동물이었기에 이중섭에게 소는 아주 각별한 의미였습니다.


앞서 말한 스승 임용련은 그에게 기교를 위해선 기본을 충실히 하라 강조했다고 합니다. 고수는 괜히 고수가 아니에요.


출처 : 국가 기록원
출처 : 국가 기록원


이중섭에게 ‘소’가 각별한 했던 건 다작을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작품에는 작가의 철학과 감정이 투영되듯 ‘소’는 결국 이중섭 작가 본인을 의미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활기가 돌았던 시기에 그린 소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그가 생을 마감하기 1여 년 전의 소는 누가 봐도 곧 죽음을 맞이할 것만 같은 에너지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습작의 대상, 한국의 정신, 그리고 자신까지 투영된 ‘소’는 어찌 보면 이중섭을 대표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황소> (1950년대 추정)
<황소> (1950년대 추정)
<소> (1955)
<소> (1955)

Keypoint☝🏻


🐮 습작을 해야할 그에게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소'는 좋은 피사체 였습니다.

🪞 '소'는 단순한 습작의 대상이 아니라 이중섭 자신의 '자화상'으로 보는 것도 좋은 해석입니다.





불행의 시작, 가난과 이별.


<바닷가와 아이들> (1952)
<바닷가와 아이들> (1952)


불행의 시작은 원산이 공산당으로부터 점령 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형은 친일 부르주아로 몰리며 사망하였고, 남북전쟁이 터지며 원산은 잿더미로 변해 버립니다. 이때 이중섭의 젊은 시절 작품들이 모두 훼손되고 말죠. 


현재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이중섭의 작품이 대부분 레플리카인 이유가 이때문이라고 해요.


이에 맞물려 이중섭의 첫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질병으로 사망해버립니다. 그때부터 이중섭은 ‘아이들’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죠. 이중섭의 그림에는 대부분 그리움과 애환 같은 감정이 서려 있습니다.



<가족들과 첫 눈> (1950)
<가족들과 첫 눈> (1950)


당시 부인과 자식을 데리고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피난을 간 이중섭은 가난과 실의에 빠집니다. 부둣가에서 일을 하고, 페인트칠을 하며 살던 이중섭은 결국 더 남쪽에 위치한 제주도로 다시 한번 이전을 합니다.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던 시절은 지독하게도 가난했지만 가족 모두가 함께 옹기종기 모여 살던 시절로, 이중섭이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시기로 꼽히기도 합니다.



이중섭이 가족과 머물렀던 제주도의 단칸방.
이중섭이 가족과 머물렀던 제주도의 단칸방.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중섭의 아내와 아이들도 건강이 악화되어 그들은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당시 이중섭도 함께 떠나려 했으나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함께가지 못했고, 이중섭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가난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Keypoint☝🏻


🇰🇷 원산 폭격, 피난에 맞물린 가난 등은 이중섭의 인생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 첫 째 아들을 잃은 뒤 실의에 빠져 <아이들>을 소재로 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 훗날 식솔과 함께 피난을 간 제주도의 생활은 가난했지만 가장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 아내와 자식은 일본으로 넘어가지만 이중섭은 여권 발급 문제로 함께 하지 못합니다.


👨‍👩‍👦‍👦  가난하고 힘들어도 오직 가족.

❤️ <은지화>의 담긴 그의 사랑.


<두 아이> (1950)
<두 아이> (1950)



이미 도쿄 시절부터 실험했던 기법으로 이중섭의 ‘소’와 더불어 대표작을 꼽히는 ‘은지화’입니다. 특히 이 은지화는 부산에서 머물던 시절에 다작되었습니다. 당시 가난했던 나머지 담뱃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정도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으나 은박지가 포함된 담배 자체가 그다지 저렴하지 않았기에 은지화가 갖는 의의는 혼란스러운 전쟁과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의 예술혼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은지화는 자신의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직관적인 매개이자 그의 외로움을 대변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Keypoint☝🏻


🖌 <은지화>는 가난 속에서도 불타오르던 그의 실험정신과 예술혼을 대변하는 그림입니다.

👨‍👩‍👧‍👦 <은지화>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아냈습니다.




🧪독약이자 비극이 되어 버린,

단 두 번의 개인전.



일본에 있는 가족들을 밀입국하여 일주일 간 만난 이중섭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절망에 빠지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돈을 벌면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게 됩니다. 굳은 결의와 에너지로 작업 활동을 이어가고 당시 미술계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김환기 작가나 구상 시인에게 도움을 청해 1955년에 처음으로 서울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기대에 부푼 이중섭은 총 45점의 작품을 내놓았는데 그중 23점이 판매되었으나 대금이 지불되지 않아 엄청난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다수의 작품을 친구들에게 주거나 태워 버렸다고 해요.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기회가 생겨 남은 작품을 들고 대구에 내려가 두 번째 개인전을 엽니다. 그때는 이중섭의 이름을 알리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으나 역시나 작품이 팔리지 않아 그의 몸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갑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전시가 완전한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자신의 작품을 동료들에게 주거나 몇 작품은 태워 버리는 등의 절망적인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1956년, 실의에 빠져 살던 이중섭은 갑자기 들이닥친 정신병과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 건강 악화로 무연고 사망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이중섭의 친구였던 김병기 화백이 뒤늦게 이중섭의 사망소식을 알고 동료들과 장례를 치뤄 주었고, 결국 망우리 공원에 쓸쓸하게 안치됩니다.



Keypoint☝🏻


💰 돈을 벌기 위해 개인전을 열었지만 저조한 판매율과 대금 미지급으로 큰 충격에 휩쌓입니다.

🖼 서울에서 1회, 대구에서 1회의 개인전을 끝으로 이중섭은 실의에 빠져 살다가 결국 건강 악화로 사망합니다.

🪦 그는 무연고자로 분류된 바 있으며, 현재는 망우리 공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가족'을 담아낸 그의 작품들 모아보기

<가족> (1950)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가족> (1950)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부부> (1953)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부부> (1953)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가족과의 첫 눈> (1950) 출처 : 이건희 컬렉션
<가족과의 첫 눈> (1950) 출처 : 이건희 컬렉션
<낙원의 가족> (1950)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낙원의 가족> (1950)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두 아이> (1950)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두 아이> (1950)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바닷가와 아이들> (1952)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바닷가와 아이들> (1952)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봄의 아동> (1953)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봄의 아동> (1953) 출처 : 국립 현대 미술관

짜잔 아팅이 등장!

아팅이와 함께하는 오늘의 요약정리☝🏻

1. 이중섭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2. 그는 미술을 배우기 위해 민족주의 계열, 오산학교를 다녔습니다.

3. 천재 서양화가 임용련은 이중섭의 스승입니다.

4. 임용련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그곳에서 훗날 아내가 된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납니다.

5. 습작을 해야할 그에게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는 좋은 피사체 였습니다.

6 '소'는 단순한 습작의 대상이 아니라 이중섭 자신의 '자화상'으로 보는 것도 좋은 해석입니다

7. 원산 폭격, 남북 전쟁, 피난에 맞물린 가난 등은 이중섭의 인생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8. 첫 째 아들을 잃은 뒤 실의에 빠져 아이들을 소재로 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9. 훗날 식솔과 함께 피난을 간 제주도의 생활은 가난했지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10. 아내와 자식은 일본으로 넘어가지만 이중섭은 여권 발급 문제로 함께 하지 못합니다.

11. 은지화는 가난 속에서도 불타오르던 그의 실험정신예술혼을 대변하는 그림입니다.

12. 은지화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사랑을 담아냈습니다.

13. 돈을 벌기 위해 개인전을 열었지만 저조한 판매율대금 미지급으로 큰 충격에 휩쌓입니다.

14. 서울에서 1회, 대구에서 1회의 개인전을 끝으로 이중섭은 실의에 빠져 살다가 결국 건강 악화사망합니다.

15. 그는 무연고자로 분류된 바 있으며, 현재는 망우리 공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