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TTER | artist
VOL.132 수영장부터 아이패드까지, 호크니의 끝없는 시선 실험


David Hockney ©David Hockney.org.
어떤 풍경은 사진보다 오래 기억에 남죠. 햇살이 반짝이는 물결, 고요한 수영장, 창문 너머로 들어온 색감 좋은 오후처럼 눈앞에 그려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장면을 그림으로 붙잡아 두었습니다.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인데요.
화려한 색감과 명랑한 분위기 덕분에 호크니의 그림은 종종 예쁜 그림으로 소비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에 걸쳐 세상을 어떻게 보고, 그것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 질문을 품고 작업해 온 화가예요. 수영장을 그릴 때도, 아이패드로 나뭇잎을 스케치할 때도 그는 늘 ‘보는 법’에 대해 실험했죠. 그 실험은 캔버스에서 디지털 화면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호크니의 눈은 지금도 매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려 80대가 넘은 지금도 말이에요. 오늘의 레터에서는 호크니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본문 내 인용구는 약간의 의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선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It's Nice That.
1937년 영국 브래드퍼드에서 태어난 호크니는 1960년대 초반, 영국 미술계에서 주목받으며 주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술은 진지하고 근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통 회화 중심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통통 튀는 색감과 유쾌한 시선으로 비틀었죠. 호크니는 브래드퍼드 미술학교와 런던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하며 이미 ‘차세대 천재’라 불렸고, 졸업 전부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작업은 회화와 드로잉이라는 전통적인 기반 위에 놓여 있지만, 표현 방식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사진, 무대디자인, 디지털 드로잉, 비디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했죠. 1980년대에는 폴라로이드와 복사기를 사용해 다중 시점을 탐색했고, 이후에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술까지 끌어들였죠. 도구는 계속 바뀌어도 그의 질문은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꾸준히 던진다는 점에서 한결같습니다. 호크니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간 뒤, 특유의 밝은 색감과 느긋한 구도로 호크니다움을 확립해 갑니다. 그의 대표작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영장, 창문, 햇살, 사람들이 있는 풍경들 속에는 묘하게 낯선 시선이 숨어 있죠. 호크니의 그림이 예쁘기만 한 그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안엔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담겨 있으니까요.

고요한 수영장에 남겨진 시선
David Hockney, A Bigger Splash, 1967. ©David Hockney.
호크니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950~60년대, 미술계는 추상 표현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잭슨 폴록처럼 물감을 흩뿌리고 몸짓으로 그리는 추상 표현주의가 주류였죠. 호크니도 한때는 그런 방식을 시도했지만, 결국 그의 시선은 늘 사람과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세상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일이 훨씬 더 재밌었거든요.
제게 그림은 그림을 만드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묘사하지 않는 그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뭐, 그런 그림이 완벽하게 좋은 예술일 수도 있지만, 제게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거든요.
- 데이비드 호크니, Audio Arts, 1978.
그런 그의 시선이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A Bigger Splash입니다. 텅 빈 수영장, 정적 속에 터진 커다란 물보라. 누군가 다이빙한 직후의 순간 같지만, 정작 사람은 없습니다. 물속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그 인물 대신, 캔버스 위엔 단지 물보라만이 조용히 있죠. 그런데 이 찰나의 순간을 호크니는 무려 2주에 걸쳐 그렸다고 해요. 호크니는 사진을 참고해 물보라의 선 하나하나를 작은 붓으로 정밀하게 그렸어요. 실제로는 2초도 되지 않을 그 순간을 아주 천천히, 마치 시간을 붙잡듯 그려낸 겁니다.

Willem de Kooning, The Visit, 1966-7. ©Willem de Kooning Revocable Trust/ARS, NY and DACS, London 2025.

David Hockney, 1. The Arrival, 1961-3. ©David Hockney.
이런 방식은 꽤 의외입니다. 보통 물보라를 그릴 때는 붓질로 감정을 쏟아붓거나, 물감을 튀기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호크니도 예전엔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그는 정반대의 길을 택합니다. 절제된 구성과 극도로 평면적이고 정밀한 표현을 통해, 고요한 공간 속 물보라 하나로 시선을 붙잡았죠.
물보라를 사진으로 찍으면 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고, 그 순간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변합니다.
현실에서는 물보라를 절대 이렇게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너무 빨리 일어나니까요.
그 점이 재밌어서 아주 천천히 그렸습니다.
-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1972. ©David Hockney.
그리고 또 하나, 수영장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있죠. 바로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입니다. 2018년 이 작품은 경매에서 약 9,030만 달러, 당시 기준으로 생존 작가 작품 중 최고가에 낙찰되며 큰 화제가 됐죠. 이 그림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971년, 호크니는 작업실 바닥에 떨어진 두 장의 사진을 발견해요. 하나는 물속을 유영하는 인물, 다른 하나는 아래를 응시하는 남성이었죠. 전혀 다른 이미지였지만, 두 사진을 나란히 보는 순간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두 인물을 한 그림에 넣는다는 아이디어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져 바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 데이비드 호크니
하지만 몇 달간의 작업 끝에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호크니는 이 첫 번째 버전을 결국 파기합니다. 그리고 1972년 4월, 뉴욕의 앙드레 에머리히 갤러리 전시를 한 달을 앞두고 다시 붓을 들게 되죠.

photograph for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taken in 1972 at Le Nid du Duc, a villa near Saint-Tropez in the south of France. ©David Hockney.
호크니는 자신의 펜탁스 카메라를 챙겨 프랑스 남부 생트로페 근처의 빌라로 향합니다. 그의 조수 존 스파울링과 친구를 모델로 삼아 수영장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으며, 그림 속 장면을 현실에서 연출했죠. 그렇게 런던으로 돌아온 호크니는 사진들을 벽에 걸어두고, 전 연인 피터 슐레진저의 사진도 함께 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2주 동안 하루 18시간씩 몰두했고, 그림은 뉴욕 운송을 하루 앞두고 완성되었죠. 호크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솔직히 말해서, 그 그림 작업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작업했고, 정말 짜릿했습니다.”라고 말했죠.

Jack Hazan, Film still from A Bigger Splash, 1974. ©David Hockney.
물을 그리는 건 흥미로운 형식적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물은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색깔이든 될 수 있고, 정해진 시각적 묘사는 없죠.
수영장 그림들은 물의 표면, 아주 얇은 막, 반짝이는 2차원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 데이비드 호크니
호크니가 수영장을 처음 그리게 된 건 1964년, 로스앤젤레스에 처음 도착하던 날이었습니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인 수많은 파란 수영장이 영국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더욱 인상 깊었죠. 수영장은 곧 그의 대표 모티프로 자리 잡습니다. 자유로운 공간, 관능적인 시선, 그리고 물이라는 형식에 대한 도전이 공존하는 장치였죠.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는 바로 그런 고민들이 집약된 작품입니다. 장면 속에는 응시와 거리, 기억과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죠. 그리고 이 그림 한 점은, 호크니를 시선의 화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만듭니다.

디지털로 이어진 시선
2009년, 호크니는 아이폰을 손에 쥡니다. 그리고 어느 날, 손가락으로 그린 꽃 그림을 친구들에게 이메일로 보내기 시작하죠. 장난처럼 시작된 디지털 드로잉은 곧 그의 새로운 일상이 됩니다. 아이폰에서 아이패드로 넘어가자, 작업은 점점 본격적으로 확장됐고요.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고 색을 실시간으로 바꾸며 빛의 변화를 바로바로 기록할 수 있다는 건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었어요. 호크니는 아이패드라는 매체를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을 통째로 바꿉니다. 집 앞 창문 너머로 보이는 들판, 요크셔의 숲길, 아침의 안개 같은 장면들이 훨씬 더 가까워졌죠. 무엇보다 즉각적이라는 점이 그에겐 결정적이었습니다. 보고, 느끼고, 바로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David Hockeny, Untitled No. 22, from The Yosemite Suite, 2010. ©David Hockney.
2010년, 그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여행하며 The Yosemite Suite 시리즈를 남깁니다. 아이패드를 들고 숲을 걷고, 바위를 마주하며 하늘의 변화에 따라 그림을 남겼죠. 붓 대신 손가락으로, 물감 대신 픽셀로 자연의 거대한 풍경을 포착한 이 작업은 전통 풍경화와 디지털 아트의 절묘한 접점을 보여줍니다.

David Hockeny, The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 East Yorkshire in 2011 (twenty eleven), 2011. ©David Hockney.
이듬해에는 The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 시리즈를 제작합니다. 봄이 오는 숲길을 매일 관찰하며 그린 이 그림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선과 색감으로 가득한데요. 나무가 피어나고, 하늘이 변하고, 공기의 기운이 조금씩 바뀌는 그 모든 순간이 화면 위에 기록됐죠. 붓으로는 불가능했을 법한 속도와 섬세함이, 오히려 디지털 덕분에 가능해진거죠.

David Hockeny, My Window No 778, 2011. ©David Hockney.
My Window 시리즈는 호크니의 개인적인 공간에서 나온 작품입니다. 요크셔 작업실의 창가 풍경을 매일 그리며 계절의 변화를 담아낸 이 시리즈는 그의 삶과 시선이 응축된 드로잉이죠. 아침의 빛, 흐릿한 안개, 피어나는 봄꽃. 그 모든 것이 조용히 화면 위에 앉아 있습니다.
호크니의 디지털 드로잉은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되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디지털이 주는 생동감과 섬세함은 전통 회화 못지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켰죠.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시선이라는 걸 그는 또 한 번 증명해 보였습니다. 기술은 달라졌지만, 호크니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붓을 들든, 손가락을 움직이든, 결국 그가 집요하게 탐구해 온 건 늘 같았죠. 호크니의 디지털 작업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붙잡아 둘 수 있을까’라는 오래된 질문에 그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답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탐구
수영장의 고요한 물결부터 아이패드 속 아침 햇살까지, 데이비드 호크니는 평생을 걸쳐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묻고, 그 질문에 매일 새롭게 대답해왔습니다. 추상이 유행하던 시대에도 그는 사람과 공간을 직접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죠.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손가락으로 디지털 화면 위에 시선을 붙잡아 둡니다. 세상이 너무 빨라지고, 그림이 너무 복잡해질수록 그는 오히려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한 장면을 천천히 응시하는 것, 사라지기 직전의 빛을 붙잡는 것, 그리고 하루를 관찰로 시작하는 일처럼요. 그런 태도야말로, 그가 지금까지도 매일 그림을 그리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호크니의 그림은 거창한 예술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시선이 담긴 기록이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제안입니다. 그래서 그를 이해한다는 건 잘 그리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세상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하는 일에 가깝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도구를 쓰든, 무엇을 그리고 있든 간에 말이에요. 오늘은 호크니의 시선을 따라, 익숙한 사물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건 어떨까요? 그 안에서 작은 발견이 있는 하루 되시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 마칩니다.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호크니는 일상의 선명한 장면들을 그림으로 붙잡아 두는 예술가입니다.
2. 평생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질문하며 실험을 지속해 왔습니다.
3. 그는 전통 회화 기반 위에 다양한 기술을 도입하며 시각에 대한 탐구를 이어왔습니다.
4. 당시 유행하던 추상 대신, 호크니는 사람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데 몰두했습니다.
5. A Bigger Splash는 찰나의 순간을 천천히 그려낸 호크니의 시선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6.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는 우연한 사진 조합에서 출발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입니다.
7. 호크니는 실제 장면을 연출해 수백 장의 사진을 참고하며 열정적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8. 아이폰을 계기로 시작된 디지털 드로잉은 호크니에게 새로운 창작 방식이 되었습니다.
9. 호크니는 디지털 도구를 통해 여전히 시선을 탐구하는 작가임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10. 호크니의 작업은 보는 법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이자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기록입니다.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처: HOCHE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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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32 수영장부터 아이패드까지, 호크니의 끝없는 시선 실험
David Hockney ©David Hockney.org.
어떤 풍경은 사진보다 오래 기억에 남죠. 햇살이 반짝이는 물결, 고요한 수영장, 창문 너머로 들어온 색감 좋은 오후처럼 눈앞에 그려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장면을 그림으로 붙잡아 두었습니다.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인데요.
화려한 색감과 명랑한 분위기 덕분에 호크니의 그림은 종종 예쁜 그림으로 소비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에 걸쳐 세상을 어떻게 보고, 그것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 질문을 품고 작업해 온 화가예요. 수영장을 그릴 때도, 아이패드로 나뭇잎을 스케치할 때도 그는 늘 ‘보는 법’에 대해 실험했죠. 그 실험은 캔버스에서 디지털 화면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호크니의 눈은 지금도 매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려 80대가 넘은 지금도 말이에요. 오늘의 레터에서는 호크니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본문 내 인용구는 약간의 의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선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It's Nice That.
1937년 영국 브래드퍼드에서 태어난 호크니는 1960년대 초반, 영국 미술계에서 주목받으며 주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술은 진지하고 근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통 회화 중심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통통 튀는 색감과 유쾌한 시선으로 비틀었죠. 호크니는 브래드퍼드 미술학교와 런던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하며 이미 ‘차세대 천재’라 불렸고, 졸업 전부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작업은 회화와 드로잉이라는 전통적인 기반 위에 놓여 있지만, 표현 방식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사진, 무대디자인, 디지털 드로잉, 비디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했죠. 1980년대에는 폴라로이드와 복사기를 사용해 다중 시점을 탐색했고, 이후에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술까지 끌어들였죠. 도구는 계속 바뀌어도 그의 질문은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꾸준히 던진다는 점에서 한결같습니다. 호크니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간 뒤, 특유의 밝은 색감과 느긋한 구도로 호크니다움을 확립해 갑니다. 그의 대표작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영장, 창문, 햇살, 사람들이 있는 풍경들 속에는 묘하게 낯선 시선이 숨어 있죠. 호크니의 그림이 예쁘기만 한 그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안엔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담겨 있으니까요.
고요한 수영장에 남겨진 시선
호크니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950~60년대, 미술계는 추상 표현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잭슨 폴록처럼 물감을 흩뿌리고 몸짓으로 그리는 추상 표현주의가 주류였죠. 호크니도 한때는 그런 방식을 시도했지만, 결국 그의 시선은 늘 사람과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세상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일이 훨씬 더 재밌었거든요.
그런 그의 시선이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A Bigger Splash입니다. 텅 빈 수영장, 정적 속에 터진 커다란 물보라. 누군가 다이빙한 직후의 순간 같지만, 정작 사람은 없습니다. 물속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그 인물 대신, 캔버스 위엔 단지 물보라만이 조용히 있죠. 그런데 이 찰나의 순간을 호크니는 무려 2주에 걸쳐 그렸다고 해요. 호크니는 사진을 참고해 물보라의 선 하나하나를 작은 붓으로 정밀하게 그렸어요. 실제로는 2초도 되지 않을 그 순간을 아주 천천히, 마치 시간을 붙잡듯 그려낸 겁니다.
Willem de Kooning, The Visit, 1966-7. ©Willem de Kooning Revocable Trust/ARS, NY and DACS, London 2025.
David Hockney, 1. The Arrival, 1961-3. ©David Hockney.
이런 방식은 꽤 의외입니다. 보통 물보라를 그릴 때는 붓질로 감정을 쏟아붓거나, 물감을 튀기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호크니도 예전엔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그는 정반대의 길을 택합니다. 절제된 구성과 극도로 평면적이고 정밀한 표현을 통해, 고요한 공간 속 물보라 하나로 시선을 붙잡았죠.
David Hockney,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1972. ©David Hockney.
그리고 또 하나, 수영장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있죠. 바로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입니다. 2018년 이 작품은 경매에서 약 9,030만 달러, 당시 기준으로 생존 작가 작품 중 최고가에 낙찰되며 큰 화제가 됐죠. 이 그림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971년, 호크니는 작업실 바닥에 떨어진 두 장의 사진을 발견해요. 하나는 물속을 유영하는 인물, 다른 하나는 아래를 응시하는 남성이었죠. 전혀 다른 이미지였지만, 두 사진을 나란히 보는 순간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몇 달간의 작업 끝에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호크니는 이 첫 번째 버전을 결국 파기합니다. 그리고 1972년 4월, 뉴욕의 앙드레 에머리히 갤러리 전시를 한 달을 앞두고 다시 붓을 들게 되죠.
photograph for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taken in 1972 at Le Nid du Duc, a villa near Saint-Tropez in the south of France. ©David Hockney.
호크니는 자신의 펜탁스 카메라를 챙겨 프랑스 남부 생트로페 근처의 빌라로 향합니다. 그의 조수 존 스파울링과 친구를 모델로 삼아 수영장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으며, 그림 속 장면을 현실에서 연출했죠. 그렇게 런던으로 돌아온 호크니는 사진들을 벽에 걸어두고, 전 연인 피터 슐레진저의 사진도 함께 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2주 동안 하루 18시간씩 몰두했고, 그림은 뉴욕 운송을 하루 앞두고 완성되었죠. 호크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솔직히 말해서, 그 그림 작업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작업했고, 정말 짜릿했습니다.”라고 말했죠.
Jack Hazan, Film still from A Bigger Splash, 1974. ©David Hockney.
호크니가 수영장을 처음 그리게 된 건 1964년, 로스앤젤레스에 처음 도착하던 날이었습니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인 수많은 파란 수영장이 영국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더욱 인상 깊었죠. 수영장은 곧 그의 대표 모티프로 자리 잡습니다. 자유로운 공간, 관능적인 시선, 그리고 물이라는 형식에 대한 도전이 공존하는 장치였죠.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는 바로 그런 고민들이 집약된 작품입니다. 장면 속에는 응시와 거리, 기억과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죠. 그리고 이 그림 한 점은, 호크니를 시선의 화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만듭니다.
디지털로 이어진 시선
2009년, 호크니는 아이폰을 손에 쥡니다. 그리고 어느 날, 손가락으로 그린 꽃 그림을 친구들에게 이메일로 보내기 시작하죠. 장난처럼 시작된 디지털 드로잉은 곧 그의 새로운 일상이 됩니다. 아이폰에서 아이패드로 넘어가자, 작업은 점점 본격적으로 확장됐고요.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고 색을 실시간으로 바꾸며 빛의 변화를 바로바로 기록할 수 있다는 건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었어요. 호크니는 아이패드라는 매체를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을 통째로 바꿉니다. 집 앞 창문 너머로 보이는 들판, 요크셔의 숲길, 아침의 안개 같은 장면들이 훨씬 더 가까워졌죠. 무엇보다 즉각적이라는 점이 그에겐 결정적이었습니다. 보고, 느끼고, 바로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David Hockeny, Untitled No. 22, from The Yosemite Suite, 2010. ©David Hockney.
2010년, 그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여행하며 The Yosemite Suite 시리즈를 남깁니다. 아이패드를 들고 숲을 걷고, 바위를 마주하며 하늘의 변화에 따라 그림을 남겼죠. 붓 대신 손가락으로, 물감 대신 픽셀로 자연의 거대한 풍경을 포착한 이 작업은 전통 풍경화와 디지털 아트의 절묘한 접점을 보여줍니다.
David Hockeny, The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 East Yorkshire in 2011 (twenty eleven), 2011. ©David Hockney.
이듬해에는 The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 시리즈를 제작합니다. 봄이 오는 숲길을 매일 관찰하며 그린 이 그림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선과 색감으로 가득한데요. 나무가 피어나고, 하늘이 변하고, 공기의 기운이 조금씩 바뀌는 그 모든 순간이 화면 위에 기록됐죠. 붓으로는 불가능했을 법한 속도와 섬세함이, 오히려 디지털 덕분에 가능해진거죠.
David Hockeny, My Window No 778, 2011. ©David Hockney.
My Window 시리즈는 호크니의 개인적인 공간에서 나온 작품입니다. 요크셔 작업실의 창가 풍경을 매일 그리며 계절의 변화를 담아낸 이 시리즈는 그의 삶과 시선이 응축된 드로잉이죠. 아침의 빛, 흐릿한 안개, 피어나는 봄꽃. 그 모든 것이 조용히 화면 위에 앉아 있습니다.
호크니의 디지털 드로잉은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되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디지털이 주는 생동감과 섬세함은 전통 회화 못지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켰죠.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시선이라는 걸 그는 또 한 번 증명해 보였습니다. 기술은 달라졌지만, 호크니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붓을 들든, 손가락을 움직이든, 결국 그가 집요하게 탐구해 온 건 늘 같았죠. 호크니의 디지털 작업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붙잡아 둘 수 있을까’라는 오래된 질문에 그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답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탐구
수영장의 고요한 물결부터 아이패드 속 아침 햇살까지, 데이비드 호크니는 평생을 걸쳐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묻고, 그 질문에 매일 새롭게 대답해왔습니다. 추상이 유행하던 시대에도 그는 사람과 공간을 직접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죠.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손가락으로 디지털 화면 위에 시선을 붙잡아 둡니다. 세상이 너무 빨라지고, 그림이 너무 복잡해질수록 그는 오히려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한 장면을 천천히 응시하는 것, 사라지기 직전의 빛을 붙잡는 것, 그리고 하루를 관찰로 시작하는 일처럼요. 그런 태도야말로, 그가 지금까지도 매일 그림을 그리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호크니의 그림은 거창한 예술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시선이 담긴 기록이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제안입니다. 그래서 그를 이해한다는 건 잘 그리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세상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하는 일에 가깝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도구를 쓰든, 무엇을 그리고 있든 간에 말이에요. 오늘은 호크니의 시선을 따라, 익숙한 사물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건 어떨까요? 그 안에서 작은 발견이 있는 하루 되시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 마칩니다.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호크니는 일상의 선명한 장면들을 그림으로 붙잡아 두는 예술가입니다.
2. 평생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질문하며 실험을 지속해 왔습니다.
3. 그는 전통 회화 기반 위에 다양한 기술을 도입하며 시각에 대한 탐구를 이어왔습니다.
4. 당시 유행하던 추상 대신, 호크니는 사람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데 몰두했습니다.
5. A Bigger Splash는 찰나의 순간을 천천히 그려낸 호크니의 시선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6.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는 우연한 사진 조합에서 출발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입니다.
7. 호크니는 실제 장면을 연출해 수백 장의 사진을 참고하며 열정적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8. 아이폰을 계기로 시작된 디지털 드로잉은 호크니에게 새로운 창작 방식이 되었습니다.
9. 호크니는 디지털 도구를 통해 여전히 시선을 탐구하는 작가임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10. 호크니의 작업은 보는 법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이자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기록입니다.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처: HOCHED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