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28 불꽃의 흔적 위에 새겨진 물음, 알렉스 카버 《승화》展 |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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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8 불꽃의 흔적 위에 새겨진 물음, 알렉스 카버 《승화》展


Alex Carver 《Effigy》 Installation Images, 2025. ©White Cube Seoul.


보이는 것 너머를 상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세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알렉스 카버는 이 질문들 위에 자신만의 언어를 쌓아 올립니다. 불길 속에서 피어나는 형상들 속에서 카버는 고통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감각과 사유가 교차하는 새로운 풍경을 펼쳐 보입니다. 고통과 기억,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회화라는 장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죠. 이번 전시는 그 치열한 사유의 한 장면입니다.


'인사이드 더 화이트 큐브'는 현대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 화이트 큐브 전시 이력이 없는 비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를 통해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층위를 조명하고, 새로운 예술적 담론을 제시하고자 하죠. 화이트 큐브 서울은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작가 알렉스 카버(Alex Carver)의 아시아 첫 개인전  《승화(昇華)》(Effigy)를 개최합니다.


Alex Carver 《Effigy》 Tour Photography, 2025. ©White Cube Seoul.


알렉스 카버는 초역사적인 사회·정치적 불안을 바탕으로 고통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계적 기법과 수작업을 결합한 스텐실, 프로타주 등 붓질을 겹겹이 쌓는 방식을 통해 인간 내면의 풍경을 회화적 언어로 풀어낸 신작 10여 점을 선보이는데요. 전시 제목 《승화(昇華)》의 'Effigy'는 원래 '형상'을 뜻하지만, 때로는 불태워지는 조각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카버는 이 개념을 빌려, 감정이 응집되고 해소되는 순간을 시각화합니다. 여기서 신체는 감각과 사유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실험의 장이 되죠.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회화 실험


©Alex Carver.


알렉스 카버는 뉴욕과 보이시를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입니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MFA, 쿠퍼 유니언에서 BFA를 취득했죠. 최근에는 베를린 크라우파-투스카니 자이들러에서 《Expanded Skin》(2024), 보이시 주립대학 블루 갤러리에서 《Porous Images》(2023), 바젤 미술관 Parcours 프로젝트에서 《A Desired Mesh》(2023) 등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뉴욕 나흐마드 컨템포러리, 라일스 & 킹,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비엔날레(2021) 등이 있으며, 영화 <The Unity of All Things> (2013)은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영화 작업은 테이트 모던, 베를린국제영화제, 밴쿠버국제영화제 등에서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Alex Carver, Effigy, 2024. ©White Cube Seoul.


Alex Carver, Hollow Fire, 2025. ©White Cube Seoul.


카버의 작업은 겹겹이 쌓인 이미지와 감정의 밀도로 만들어집니다. 그의 회화는 하나의 '피부'처럼 완성됩니다. 나무틀에 고정되지 않은 캔버스 위에 고전적 이미지와 현대 의료 스캔 이미지를 겹쳐 구성하고, 스텐실*과 프로타주* 기법으로 문지르고 덧입히며 층위를 쌓아가죠. 어둠을 깔거나, 밝은 임파스토 붓 터치로 감정의 결을 입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완성된 화면은 마치 엑스레이처럼 투명하면서도 밀도 높은 풍경을 보여줍니다.

*스텐실(stencil): 특정 모양을 오려낸 틀 위에 물감을 뿌리거나 칠해 그 형태를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기법.
*프로타주(frottage): 요철이 있는 물체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이나 목탄 등으로 문질러 표면의 질감을 그대로 옮기는 기법.


불 속에서 피어나는 형상


Alex Carver 《Effigy》 Installation Images, 2025. ©White Cube Seoul.


전시는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공간에서는 카버가 '지옥(Inferno)' 또는 '불(Fire)'이라 부르는 연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영감을 받은 이 시리즈는 아홉 개의 원을 통과하며 하강하는 여정을 모티브로 삼습니다. 카버는 이 신화를 빌려, 사회적·정치적·형이상학적 맥락 속에서 신체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를 탐구하죠. '지옥' 연작은 식피 확장기(Skin-graft mesher) 도면을 회화의 구성 요소로 끌어옵니다. 식피 확장기는 화상 환자의 피부를 이식할 때 면적을 확장하는 데 쓰이는 의료 장비입니다. 카버는 이 구조를 차용해, '회화는 피부다'라는 은유를 구체화합니다. 그의 화면에서는 인물들이 불길 속으로 뒤엉켜 있으며, 고통과 황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순간이 기독교 성화의 구도와 중첩됩니다.


Alex Carver, Effigy, 2024. ©White Cube Seoul.


대표작 <승화 Effigy>에서는 불꽃 속에 몸을 던진 인물들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은 동시에 어떤 신성한 열망을 품은 듯한 표정을 띠죠. 이는 회화를 향한 카버의 집착과도 닮아 있습니다. 관람자는 이 화면 앞에서 본능적으로 '지옥'의 열기를 마주하게 되죠.


Alex Carver, Indifferent Eye, 2024. ©White Cube Seoul.


Alex Carver, Indifferent Eye, 2024. ©White Cube Seoul.


이어지는 작품 <무심한 눈빛 Indifferent Eye>에서는 수술실 구조를 차용해 뒤엉킨 인물들과 혼돈의 장면을 그려냈습니다. 부드럽게 번지는 터치와 왜곡된 사지들은 일종의 아비규환을 형성하며, 무심한 듯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고통의 한가운데를 응시하게 하죠. 


Alex Carver 《Effigy》 Installation Images, 2025. ©White Cube Seoul.

공간의 끝에는 삼면화 구조로 배치된 세 작품, <숭배자들 The Devoted>, <상변화 Phase Transition>, <공허한 표기 Hollow Fire>가 이어집니다. 불타오르는 인체는 점차 배경 속으로 사라지며, 고통을 넘어서는 또 다른 에너지와 변화를 암시합니다.


Alex Carver, The Devoted, 2025. ©White Cube Seoul.

Alex Carver, Phase Transition, 2025. ©White Cube Seoul.


Alex Carver, Hollow Fire, 2025. ©White Cube Seoul.


사라진 몸, 남겨진 풍경


Alex Carver 《Effigy》 Installation Images, 2025. ©White Cube Seoul.


두 번째 공간에서는 '풍경(Landscape)' 또는 '공기(Air)' 연작이 펼쳐집니다. 여기서 카버는 인간의 형상을 지워냈습니다. 남은 것은 공기의 흐름처럼 추상적인 이미지뿐입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유려한 선들은 수술실의 무균 공기 순환 시스템 도면에서 가져온 것이죠. 화상 환자의 감염을 막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은, 이곳에서는 하나의 추상적인 풍경으로 변모합니다. 하지만 카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지옥' 연작의 이미지들을 대형 종이에 옮긴 뒤 폼 보드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다시 프로타주(frottage) 기법으로 전사합니다. 그렇게 수없이 쌓인 흔적 위에 인간의 존재는 지워지고 풍경만이 남습니다. 이 안에서는 형상과 배경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같은 무게를 지니죠.

 

Alex Carver, Primitive Accumulation, 2025. ©White Cube Seoul.


Alex Carver, All That Is Solid, 2025. ©White Cube Seoul.


<원시적 축적 Primitive Accumulation>과 <견고한 모든 것 All That Is Solid> 같은 작품 제목도 눈길을 끕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사회적 폭력과 생명·정치적 통제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드러냅니다. 카버에게 회화는 '유연하고 은유적인 피부'입니다. 형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부 위에 상처를 남기듯 질문을 새기죠. '풍경' 연작은 인간 중심적 재현 방식을 거부하며, 회화라는 장르 자체에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야말로, 알렉스 카버 작업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룹니다.


회화라는 피부 위에 남긴 질문


Alex Carver 《Effigy》 Installation Images, 2025. ©White Cube Seoul.


전시의 첫 번째 공간과 두 번째 공간을 오가며, 우리는 알렉스 카버가 회화를 통해 어떻게 사유의 결을 확장해 나가는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고통과 열망, 형상과 추상 사이를 넘나드는 그의 시선은 회화라는 장르에 깊은 질문을 던지죠. 이번 전시에 소개된 두 연작은 인간의 형상을 따라가면서도 그 경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카버는 부드럽고 은유적인 '회화의 피부' 위에 사회와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겹겹이 새겨 넣으며,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 온 그림의 방식을 흔들어놓습니다. 동시에 '표현하는 일'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지도 깊이 고민하죠. 형상을 지우고, 다시 새겨나가는 치열한 과정. 그 흔적 위에 남은 것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구조와 표현의 윤리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입니다. 카버가 만들어낸 승화의 결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보시길 권합니다.


알렉스 카버 《승화(昇華)》(Effigy)展
- 장소: 화이트 큐브 서울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45길 6)
- 기간: 2025. 4. 25. – 2025. 6. 14.
- 시간: 화-토, 오전 10시-오후 6시



오늘의 뉴스레터 내용 요약 💌

1. '인사이드 더 화이트 큐브'는 화이트 큐브 전시 이력이 없는 작가를 조명하는 프로그램으로 알렉스 카버의 아시아 첫 개인전 《승화(昇華)》(Effigy)를 개최합니다.

2. 이번 전시에서 카버는 고통을 재해석하며 기계적·수작업 기법을 결합해 인간 내면을 그린 신작을 선보입니다.

3. 전시 제목 'Effigy'는 감정이 응축·해소되는 형상을 시각화하는 카버의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4. 카버의 회화는 이미지와 감정이 층층이 쌓인, 피부처럼 밀도 높은 화면을 만듭니다.

5. '지옥' 연작은 신체와 고통의 은유로 식피 확장기 구조를 회화에 끌어와 구현됩니다.

6. 대표작 <Effigy>는 불꽃 속 인물들의 형상을 통해 고통과 열망의 복합적 감정을 담아냅니다.

7. '공기' 연작은 인간 형상을 지운 채 의료 도면을 추상 풍경으로 재구성합니다.

8. 작품 제목들은 회화를 피부로 삼아 사회·정치적 통제를 비판하는 카버의 시선을 드러냅니다.

9. 형상을 지우고 새기는 카버의 과정은 인간을 둘러싼 구조와 윤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집니다.

10. 형상의 흔적 위에 새겨진 카버의 질문들을 직접 마주해 보시길 바랍니다.


Editor. Jang Haeyeong
섬네일 출저: White Cube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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